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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짝패 30회-천둥과 귀동의 운명이 바뀐 이유

by 자이미 201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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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과 귀동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며 싸워야 하는 상황은 시대가 만든 아픔입니다. 어수선한 세상에 서로 달라진 신분을 모른 채 짝패로 살아왔던 그들이 다시 한 번 세상이 만든 틀 속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 상황은 어쩌면 우리가 마주했던 슬픈 현대사와 다름이 없어 보입니다.

천둥의 마지막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꼭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날 수밖에는 없다고 천둥과 귀동은 극적인 상황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서로 총을 겨누고 칼로 싸움을 벌이다 주먹다짐을 하면서도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한계는 그들이 생각하는 가치의 충돌일까요? 아니면 운명이 만들어 놓은 개인사에 대한 분노일까요?

"더 이상 짝패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리는 귀동과 자신에게 건넨 믿기 힘든 진실에 천둥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자신과 귀동의 인생이 바뀌었고 친부는 다름 아닌 김대감이라는 말은 그로서는 믿기 힘든 일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탐관오리이자 공공의 적인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그를 더욱 힘겹게 할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 어떤 선택도 쉽지 않게 만들어버린 이 운명의 장난은 천둥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할지 알 수 없습니다.

아래적의 두령이 된 천둥이 자신이 주도해 척살 해야만 하는 대상이 알고 보니 친아버지라는 사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짝패의 아버지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를 힘겹게 했는데 친아버지를 척살해야만 하는 운명 앞에서 서있다는 사실은 그를 힘겹게 할 뿐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로만 알고 있었던 막순을 찾아간 천둥은 그녀에게 칼을 들이대며 진실을 알고자 합니다. 왜 자신을 속이고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질책이 이어져도 사실이 바뀔 수는 없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분노를 해보고 눈물을 흘려 봐도 변할 수 없는 상황에 천둥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래적으로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잘 짜여진 이야기처럼 여기까지 오게 된 슬픈 운명을 타고난 천둥. 어쩌면 그는 이런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거지 움막에서 자라며 "모두가 양반인 세상"을 꿈꾸었던 천둥. 어쩌면 운명은 그에게 스스로가 원하는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가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입니다.

양반으로 태어나 양반의 권리를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그는 그래서 가장 적합한 아래적의 두령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양반임을 포기한 채 탐관오리들을 척살하고 모두가 양반인 세상을 만드는데 있어 천둥만한 존재는 없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알고 난 후 천둥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생각이 많았던 그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하게 되었고 그런 그의 변화는 아래적의 행동이 과격해지게 만들었습니다. 탐관오리들을 척살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포청을 습격해 무기를 훔치는 일까지 그동안 천둥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행동들로 마지막으로 향해가는 <짝패>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공포교의 부탁으로 귀동은 왈자 패들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아래적으로 둔갑을 했지만 두건 속에 감춰진 얼굴에는 왕두령의 수하의 모습이 있었고 이는 곧 자신을 습격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김대감에 의해 목숨을 건진 귀동은 김대감을 밀어내면서도 자신의 친모인 막순에게는 손을 내밉니다. 

민심이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저자거리에서의 모습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래적이 붙인 괴서를 떼러 나온 포졸들에게 건넨 한 마디였습니다.  

"그거 떼지 마시오. 나 아직 덜 읽었소"

라는 과거 현감의 말에 포졸들이 겁박을 하자 너나없이 자신이 그랬다며 나서는 모습에서 민심의 힘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합니다. 탐관오리의 패악 질이 극에 달하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게 된 민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누군가의 의지는 곧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만약 아래적 같은 존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민중들이 감히 공권력에 대항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공포정치에 짓눌려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을 그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대항할 수 있는 힘은 누군가 햇불을 들고 망루에 올라가 함께 세상을 바로보자고 외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거 권력을 가졌던 현감이 떡 장사가 된 이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장면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탐관오리였던 그가 죽음 직전까지 몰리며 몰락했던 그가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연합니다. 떡 장사가 되어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니 탐관오리였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는 없는 법이지요.

권력을 통해 수탈에 앞장섰던 그가 수탈의 대상이 되자 고통에 찌든 백성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백성들의 아픔을 저버리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하는 그들이 나락으로 떨어져봐야 자신들이 억압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면서도 요원한 일이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보수주의로 권력에 기생하는 삶이 바른 삶이라고 이야기해오던 황노인의 변화도 주목할 부분이지요.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아래적과 두령이었던 강포수를 욕하기에 바빴던 그가 변해가는 세상을 통해 무엇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는 과정은 어쩌면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게 천둥을 만난 김대감은 "내가 아버지다"라는 말을 건네지만 천둥은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다고 말합니다. 탐관오리인 김대감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말하는 천둥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운명을 맞이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극적인 반전이자 드라마적인 재미 요소들이 최대한 배제된 상황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이란 크게 달라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척살의 대상인 김대감과 그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천둥. 여전히 아버지라 생각하는 귀동의 역할 등이 맞물리며 <짝패>는 마지막을 향해갑니다.

영웅이 만들어가는 세상보다 민중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가는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짝패>. 한 사람이 백 걸음을 내걷는 것보다는 백사람이 한 걸음을 내걷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캐릭터의 힘이나 관계 설정, 시청자들을 끌어당기는 이야기의 힘이 아쉽게 다가오기는 하지만 <짝패>가 들려주는 우화는 우리 시대를 되돌아보게 하는 반면교사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남은 두 번의 이야기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소중한 내용일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어긋난 운명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백성이 임금인 세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였습니다. 장난같은 운명의 희생양이 된 천둥은 스스로 '모두가 양반인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운명에 그는 양반임을 포기하고, 아래적의 몸으로 세상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망루에 올라서려합니다. 천둥과 귀동을 통해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하는 <짝패>.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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