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8. 10:37

뿌리깊은 나무 14회-한글 반포 두고 벌인 한석규와 윤제문의 지략 대결이 흥미롭다

똘복이가 아버지의 유서를 보고 궁으로 향하며 마무리된 지난 회에 이어, 세종 앞에선 똘복이와 무휼의 모습은 서로의 길이 다른 세 남자의 극적인 대립이었습니다. 정기준은 그동안 모아둔 증거들을 통해 세종이 글자를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반격에 나섭니다. 이런 정기준의 반격에 맞선 세종의 지략 역시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이어지며 드라마는 더욱 극적인 상황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세종과 정기준의 지략 대결, 돌아 온 똘복이의 활약




자결을 하려던 똘복이 채윤은 궁으로 향하고 두 번째 판관이 곧 올 거라는 담이 소이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길을 비워 놓으라는 세종. 그렇게 세종 앞에 나선 똘복이는 칼을 겨누고 세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의 칼과 마주합니다. 젊은 시절 태종이 칼을 뽑아 자신을 베려 했을 때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현재의 세종은 죽음 따위에는 두려움조차 가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세종의 옆을 지키는 무사 무휼은 칼을 뽑아 어명을 거부한 채 똘복이를 겨눕니다. 과거 선왕에게도 칼을 겨눴던 자신인데 지금이라고 달라지겠냐며 세종이나 똘복이의 길이 있다면 무사 무휼의 길도 있다며 세종을 지켜야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합니다.

이미 똘복이의 감정과 머릿속을 모두 읽고 있는 세종은 자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결을 하기 위해 찾아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글자를 만들어야만 하는 세종의 대의명분과 글자로 민중이 달라질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거칠게 대립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똘복이는 자신만이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세종 역시 똘복이를 구하는 순간 함께 지옥에 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왕이 되어 단 한 번도 편안한 생활을 한 적이 없는 자신의 삶은 지옥과도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똘복이가 이야기하는 태평성대는 임금이 편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말은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이들이 편안하고 행복해지면 대중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철학은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통용될 수밖에 없는 진리일 테니 말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만 행복한 현재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를 생각해보면 세종의 이 발언이 얼마나 위대한 말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글자를 익힐 시간도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글자란 무의미하다는 똘복이. 양반들은 모두 글자를 알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이 글자를 안다고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신분제의 한계를 비유해 새로운 글자 무용론을 펼치는 똘복이의 모습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발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글자를 익히기 되면 억울한 죽음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세종의 주장 역시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글자를 익힌다면 신분을 뛰어넘어 일반 백성들이 양반이 되고 궁으로 들어서는 일이 일어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양반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집니다.

힘은 안 생기고 책임만 뒤집어쓴다는 말로, 글씨를 알았다는 이유로 모든 죽음의 원흉이 되었던 담이의 사례를 통해 당시 글을 둘러싼 엄중한 상황들을 이야기하는 똘복이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초반 세종과 똘복이가 나누는 대사는 한글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대립각이었고 이는 곧 세종이 넘어서고 이해시켜야만 하는 절대적인 가치였습니다.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세종의 간청에도 쓸쓸하게 뒤돌아가는 똘복이는 스스로 이제 자신은 죽고 자신이 스스로 만든 거짓된 삶인 채윤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뚜렷한 장소에서 아버지와 담이 아버지를 만나 이 허망한 상황을 마주하는 장면은 똘복이의 변신을 위한 정리 작업으로서는 적당했습니다.

세종이 글자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정기준은 모든 것을 동원해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신적을 중심으로 궁에서 새 글자를 만드는 일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유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혜강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을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밀본'이 과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가 명확해집니다.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인 독재에 제동을 걸고 제상들이 나라를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정기준의 모습은 기득권 세력들의 밥그릇 쟁투와 다름없었습니다. 스스로 백정이라는 가장 낮은 신분으로 위장하며 25년을 살아왔음에도 백성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힘겨워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그는 그저 대의명분만 가지고 있을 뿐 진정성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유림들의 세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당연하다는 그의 모습은 군부독재를 위해 명분을 만들어 쿠테타를 했던 과거의 독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나서는 그의 모습 속에 가장 중요한 백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그가 스스로 조롱하고 비하하며 외면하고 싶었던 세종 이도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냈으니 말입니다.

왕을 견제해서 독선의 정치를 막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느냐라는 명분에서는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기준의 난의 그저 사대부들의 권한을 극대화시켜 기득권 세력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왕 이상의 권력을 가지겠다는 사욕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가 진정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존재라면 스스로 백정이 되어 생활했던 25년의 세월은 값진 경험으로 이어졌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이들에게 군림하려는 못된 습성만을 가진 존재일 뿐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중국을 어버이 나라로 섬기고 성리학을 숭상하며 백성들은 한낱 무지한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기준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밀본에는 결정적으로 사대부들의 권리와 권한은 중요하게 거론되지만 백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존재들로 전락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서로의 수를 읽으며 책략을 쓰는 세종과 정기준의 모습은 흥미로웠지만 많은 이들이 정기준이 아닌 세종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모든 것이 가상의 이야기라고 해도 대중들이 세종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내세우는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닌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기준은 사대부의 가치를 내세워 대의명분만 얻으려는 기득권자들의 간교함으로 일관하지만 세종은 백성들이 느끼는 태평성대를 위해 스스로 지옥 같은 생활을 자처한 존재라는 점에서 둘은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한자로 못쓰면 이름도 쓸 수 없는 세상에서 세종은 모든 백성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언어를 문자로 쓸 수 있는 글을 만들었습니다. 어린 연두가 개파이의 본명을 써주고 싶다며 자신은 새로운 글이 나오면 익히고 싶다고 하는 장면에서 한글의 유용성과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소이와 광평대군을 구하기 위해 '한짓골 똘복이'로 돌아온 채윤의 활약은 극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후반전을 준비하는 그들에게 채윤의 존재감은 중요하게 다가오고 숨어 있던 개파이와 이방지가 모습을 드러내며 벌이는 대력 역시 흥미롭기만 합니다. 대의명분만 앞세운 채 기득권 세력들의 가치만 내세우는 정기준과 백성들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대립각은 더욱 날카롭게 대치할 수밖에는 없고 그런 가치의 충돌은 <뿌리깊은 나무>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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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ream 2011.11.18 13:33 address edit & del reply

    태조 이방원이 세종의 모든 일을 지지하고 어느 것도 막지 말라고 하셨다는 유지가 너무 감동이었습니다. 오로지 밀본만 막으라, 세종이 하는 모든 일, 그 어떤 것도 막지말라....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아들에 그 아버지...^^

    • Favicon of https://dramastory2.tistory.com BlogIcon 자이미 자이미 2011.11.18 15:13 신고 address edit & del

      여러 아들 중 세종을 특히 총애하고 그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준 것은 그만큼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성군을 알아보는 태종 역시 어떤 면에서는 성군일 수밖에는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