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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뿌리깊은 나무 16회-정기준이 세종과 같은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었던 이유

by 자이미 201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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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만으로도 <뿌리깊은 나무>는 이미 그 가치를 넘어섰습니다. 여기에 위정자들의 탐욕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밀본의 행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탁월한 연기와 이야기의 힘이 모여 '한글'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하는 이 드라마는 이제 단순한 드라마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사대부라는 집단 이기주의만을 챙겼던 정기준의 한계




반나절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스스로 한글로 쓰고 읽는 기술을 익힌 채윤은 자신이 얼마나 우매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남의 글 천자를 익히기 위해 얼마나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는지 알고 있는 채윤에게 단 28자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채윤은 자신이 오랜 시간 품어왔던 복수마저 버릴 정도로 대단한 가치였습니다.

스스로 세종 앞에 무릎을 꿇고 비로소 세종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던 채윤은 밀본을 뿌리 채 뽑아낼 수 있는 전략을 세웁니다. 표피만 알고 내면을 알지 못하는 밀본의 채윤과 세종의 관계를 역이용해 그들의 내부로 침입해 밀본의 중심인 정기준의 정체를 밝히는데 집중합니다.

상황판단이 정확하게 되지 않는 밀본으로서는 이미 주도권을 빼앗기고 채윤과 세종이 원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채윤의 등장에 기겁하며 그가 왜 돌아왔는지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 바쁜 밀본은 광평 대군이 궁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경악해합니다. 자신보다 더욱 대단한 존재가 아니냐며 채윤을 통해 세종과 조선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채윤이 이를 이용해 자신들 속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피상적인 동선만을 가지고 확신하는 그들로서는 채윤만한 적임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세종의 말에 조정 대신들이 입궁을 거부하고 시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여준 세종의 모습은 대단히 파격적이었습니다. 힘으로 군림하고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이들과 달리,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내는 세종의 모습은 그가 왜 위대한 왕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국운이 달린 한미 FTA를 위정자들이 나서서 단 5분 만에 처리하는 2011년의 대한민국. 이런 경악스러운 상황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고 촛불을 집어 들자 영하로 떨어진 차가운 날씨에 물대포를 쏘아 진압하는 권력들의 모습은 왜 그들이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국민들에게 무엇이 옳은 일이고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심어주지 못한 채 오직 자신들의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위정자들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세종의 행보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왕의 권한으로 권력을 동원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음에도 그런 단순하고 명쾌한(물론 피를 부르는 권력은 한계가 명확하지만) 방법이 아닌, 자신에게 왜 반대를 하는지 묻고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세종의 존재감은 경탄스러울 지경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역시 지난 정권에서 경험해봤던 일이기도 합니다. 직접 나서서 검찰의 문제를 언급했던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행보를 역이용한 검찰 조직의 부패는 우리 사회를 얼마나 퇴보시키고 있는지는 우린 똑똑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개혁에 나서야 하는 것이 검찰이라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모든 이들 앞에 공정해야만 하는 법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자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며 반박을 하는 유림을 이끄는 혜강에게 그들이 맹신하는 삼봉의 글을 이용해 반박을 합니다. '백성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그들의 반박에 세종은 백성의 소리를 듣겠다며 나선 관료들이 어려운 학자를 익혀 이를 자신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으로서 백성들의 뜻을 왜곡해 나라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삼봉 역시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며 반박합니다. 


백성의 소리를 듣겠다면서 정작 그 소리를 왜곡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위정자들만 양산하게 한 어려운 한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소리를 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글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생각이 유학을 버리는 것이라 생각하느냐는 세종의 반격은 혜강마저 아무 소리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쉬운 글이 있어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관료의 말에 선비는 글을 배우는 것이 일이건만 쉬운 글이 있다고 한자를 버리면 그게 선비냐며 반박합니다. 사람의 선악은 그 사람의 자질에 달려있다는 이에게 유학이란 끊임없는 수양으로 인간 본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나태하고 무능한 사대부들을 비판합니다. 백성들에게 이롭게 하기 위한 농서들을 배포하기 위해서 글자가 필요하다면 관료들의 수를 늘려 백성들에게 전포하면 될 것이라는 이야기에 세종은 그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새롭게 늘어난 관리들은 누가 먹여 살리느냐며 그렇게 되면 다시 백성들에게 고혈을 짜내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는 세종의 말들은 누구도 반박 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백성들을 위함이라는 명분 아래 철저하게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던 위정자들에게 세종의 이야기는 정곡을 찌르고 반박할 가능성조차 막아버린 진리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한글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는 밀본 일당에게 세종의 모습은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중화주의에 빠져 있는 사대부들에게 세종의 새로운 글자는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자들이 결국 한자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세종의 글 역시 반포가 된다 해도 백성들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그들은 의정부서사제의 실질적인 정착과 집현전을 철폐하는데 모든 것을 집중하려 합니다.

의정부 사서제는 왕의 권한을 한정시키고 재상들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전략입니다. 영원한 권력을 가지려는 사대부들의 탐욕의 산물로 다가온 재상 총제제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비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철저하게 사대부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영원히 자신들의 몫으로 가지려는 탐욕일 뿐이었습니다.

집현전을 단순하게 세종의 절대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는 그곳만 폐쇄한다면 자신들의 권한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세종의 집현전은 자신의 평생 대업인 '한글'을 창제하기 위한 한시적 공간이었을 뿐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단단하게 만드는 공간은 아니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매한 그들을 이용해 한글 반포를 당연시하기 위한 세종의 지략은 이미 우매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정기준을 넘어서 있었습니다.

이런 세종의 지략을 간파하고 두려워한 존재는 집현전을 지키려는 최만리였습니다. 새로운 글자의 정체도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막으려는 자신이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종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그는 십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해왔던 세종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세종의 글자는 아무도 쓰지 않고 사라질 것이라는 맹신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분명 무서운 글자일 것이라는 최만리의 예측은 분명해집니다. "이 글자가 반포된다면 한자와 한문을 배척하고 만백성이 전하께서 만드신 글자를 쓰는 세상이 올 것이야"라는 최만리의 예측은 정확했습니다. 모두가 글을 알고 쓰는 세상이 온다는 것은 사대부를 지탱하는 권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기준을 두렵게 합니다.

한글의 우수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그에게는 세종이 만들었다는 글자에 대해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미 다른 문자들이 그러했듯 어려운 글자를 백성들이 익힐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지요. 글자 반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종의 힘의 근원들을 꺾어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하던 정기준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정기준의 참모인 한가놈이 한글의 근본 원리가 적힌 것을 며칠 동안 고민하다 개파이와 연두에게 가르친 후 놀라운 변화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한글 반포를 허락하고 집현전을 폐쇄하는 것으로 세종의 힘을 둔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던 정기준은 이 놀라운 글자의 힘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랑캐인 개파이와 한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 연두가 단 이틀 만에 세종의 글을 깨우쳐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쓰고 이를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이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인 '글 권력'이 한글로 인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글'이 사대부를 낳았고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었는데 그런 '글'이 세상 모든 백성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게 된다면 자신들의 세상은 결코 올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정기준에게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글 반포를 막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대부와 일반 백성을 분명하게 가르고 있는 권력의 힘이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정기준에게 세종의 한글은 그런 권력의 구분을 파괴하는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나라, 자신들이 백년 만년 권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었던 탐욕은 세종이 만든 쉬운 글자로 인해 최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그럴 듯한 논리로 자신들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해도 밀본을 이끄는 정기준이나 사대부들은 '글'을 통해 얻은 권력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하려 할 뿐 절대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백성이란 자신들이 보살피고 이를 대가로 그들의 고혈을 뽑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존재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은 세월이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료가 되는 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유로 권력자를 행세하며 국민들을 우롱하고 그들을 경시하는 위정자들은 과거 정기준이 생각하는 수준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울 정도입니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안위가 우선이고 이를 통해 권력을 영구히 자신들의 것으로만 만들려 하는 모습은 세종이 다시 살아난다면 경악스러워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대부를 대표하는 정기준이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을 따르는 특정 세력을 대변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들의 권력과 이를 통해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들 무리가 세종대왕을 넘어설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극에서 많이 다루었던 권력 다을 다른 관점이 아닌 '한글'을 가치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위대한 드라마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속된 욕심으로 가득한 위정자들에게 시원하게 일갈하는 세종의 분노들은 마치 현실 속의 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듯 속이 시원해지니 말입니다.


- SBS 방송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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