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8. 10:05

뿌리깊은 나무 19회-한석규로 인해 왕 연기의 기준은 새롭게 세워졌다

극적인 상황에서 세종과 정기준이 나눈 국민의 역할은 무척이나 의미 있는 토론이었습니다. 과연 국민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의 격렬한 토론은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끝장 토론 이후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혼란을 겪던 이들의 변화들은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권력은 과연 소수의 책임질 수 있는 자들만의 몫인가?




가리온이 정기준일 것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종은 의외의 상황 순간 가장 지근거리에서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웠던 이가 밀본의 핵인 정기준이었다는 사실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습니다. 설마 가리온이 정기준일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이런 상황은 당혹스럽기만 했습니다. 

세종으로서는 낯선 상황이기는 했지만 정기준과의 토론을 요구했던 만큼 자신이 원했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무휼과 개파이가 날 선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토론을 하자는 세종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대단하게 다가왔습니다. 19회의 핵심은 초반 등장했던 세종과 정기준의 토론이었습니다.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들은 '뿌리깊은 나무'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논쟁은 흥미롭게 다가올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힘을 믿는 세종과 무지몽매한 그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는 정기준의 대립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그 가치 기준의 차이는 너무 단단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대단한 글자를 만들어 역설적이게도 막아야만 하는 명분이 생겼다는 정기준과 그런 그를 깨닫게 하기 위한 세종의 토론은 서로의 가치들이 충돌하며 과연 백성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합니다.

무지몽매하고 책임질 수 없는 백성들이 글자를 알게 되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지옥과도 다름없다고 외치는 정기준. 삼봉이 주장했던 언로의 해방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며 백성이 깨우치면 보다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세종의 주장은 같은 곳을 보고 있지만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대부의 욕망은 멸망한 고려와 다름 없이 음서제도 등을 부활시켜 스스로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이야기하는 세종은 그 대안이 곧 백성들의 견제에서 시작된다고 강변합니다. 그런 세종에게 백성들의 욕망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반격하는 정기준의 모습은 그 치열한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대부의 욕망이 있듯, 백성들에게도 욕망이란 존재하는데 신분 질서가 엄연한 사회에서 과연 수없이 터져 나오는 백성들의 욕망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정기준의 반격은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글을 알면 많은 지식들을 탐하게 되고 그렇게 탐한 지식은 곧 권력을 잡기 위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기득권을 가진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바로 '욕망을 가지게 된 백성'일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질서와 조화를 내세우며 기득권을 이야기하는 정기준과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백성에게서 찾겠다며 기득권 견제를 이야기 하는 세종의 모습은 치열한 대치 점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주었습니다. 거대한 바다와 같은 욕망을 이미 경험해봤던 세종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글 창제가 시작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백정으로 자신을 숨기며 살아왔던 정기준이 내뱉듯 던진 무지몽매하고 책임감도 없는 백성이라는 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신분제도가 명확한 사회에서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사랑하과 위하는 마음으로 만든 한글. 그런 한글과 세종을 공격하기 위해 정기준은 세종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에게 권력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기 위함이 아니냐는 그의 반격은 세종을 힘들게 합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백성이 귀찮아져서 너무나 완벽한 한글을 통해 자신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겠느냐는 정기준의 말은 세종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맙니다.

그 스스로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백성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귀찮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분노하며 소이에게 경멸하듯 이야기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런 자신의 숨겨진 마음 한 켠에 백성에 대한 귀찮은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하게 합니다.

정기준 역시 세종과의 토론을 통해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글을 모든 백성들이 알게 된다면 성리학적 사회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대부들만이 글을 깨우치고 익혀 백성들을 다스리고 깨우치게 하겠다는 논리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이 말한 권력의 집중은 곧 몰락을 의미할 수밖에 없기에 그 역시 사대부가 부패할 수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불교의 이념이 모든 신자가 부처가 되는 것이고, 사대부들은 군자가 되는 것이라면 백성들이 한글을 익혀 성리학적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이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가기 위한 가장 훌륭한 시작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서로의 고민들을 나누던 그들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은 첫 인쇄본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성리학을 가르쳐 백성들을 깨우치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인쇄본은 불경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500년 동안 모두가 믿었던 불경은 백성들이 가장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으로서는 백성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선택해 한글을 깨우치게 하겠다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지만, 정기준으로서는 성리학이 아닌 불경을 첫 인쇄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세종이 자신에게 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고 오직 자신이 만든 한글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기준은 광평대군을 시해합니다.

광평대군의 주검(광평대군은 가시가 목에 걸려 굶어 죽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입니다)을 접하고 한없이 슬퍼하는 세종.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모습을 보며 무너진 아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세종의 모습은 그동안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무너져버린 세종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채윤이었습니다. 세종이 자신의 힘으로 살린 첫 번째 백성인 채윤이 흔들리는 세종을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전개를 예고하게 했습니다.

가치들이 충돌하며 많은 것들을 고민할 수밖에 없도록 했던 19회는 흥미로웠습니다. 백성들의 역할. 그들이 과연 욕망이 지배하는 거대한 집단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만들어 내는 유일한 대상이 될지는 여전히 모호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소수의 권력자들의 모습만 봐도 그들이 국민들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는지는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지식 습득과 정도 공유를 철저하게 막기에 바쁜 권력자들의 모습은 과거 세종 시절의 정기준의 가치관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종편을 통해 기득권 세력들의 영구적인 권력 세습을 용이하게 하고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견들과 정보들이 소통되는 SNS를 규제하고 탄압하는 조직을 세운 현 정권은 과거 사대부들의 권리만을 찾고 백성들을 무지몽매하고 불평불만만 많은 나약한 존재라고 폄하한 정기준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보여준 한석규의 연기력은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어 열변을 하는 그의 연기는 더 이상 감정을 끄집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습니다. 분노하고 고민하고 무너지는 왕을 이토록 완벽하게 연기하는 이가 누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할 정도로 한석규의 연기는 완벽했습니다.

기존 왕이 가지고 있었던 틀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가장 인간적인 왕으로 분한 한석규로 인해 이후 등장하는 사극의 왕 역할은 무척이나 힘들 수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왕 연기의 기준이 한석규가 되었다는 점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일 수밖에는 없으니 말입니다.

세종과 정기준의 끝장토론은 우리 시대 정치를 하는 이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장면이었을 듯합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만을 위해 국민들을 우롱하는 위정자들의 모습들은 과거보다 못한 존재감으로 국민들을 희롱하기만 합니다. 국민들을 그저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종,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그들을 바라보며 세종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부패할 대로 부패해버린 권력 집단들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언로가 아닌 자로'로 인해 힘을 얻은 국민들 밖에는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민들이 똑똑해지기를 두려워하는 집단들을 상대로 국민들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바른 시각으로 현재의 문제점들을 논의하고 소통해서 미련한 세상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일 것입니다. 피를 통하는 연기로 시청자들을 감동시킨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 그가 그토록 원했던 진정한 백성의 힘. 그 힘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은 바로 현재 일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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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마디 2011.12.08 10:47 address edit & del reply

    뿌리를 보면서 더더욱 빠져들 수 있는건 현재 상황과 계속해서 오버랩되기때문인 것 같습니다. 분노하고 또 그만큼 깨닫는 게 많아져서 이 드라마 이젠 무섭기까지하네요. 글 잘 읽고갑니다.

    • Favicon of https://dramastory2.tistory.com BlogIcon 자이미 자이미 2011.12.08 12:20 신고 address edit & del

      한마디님의 말씀처럼 두려움을 느낄 정도라는 점에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현 시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판단을 해야만 하는지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2. 플라이장 2011.12.08 23:12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국민이니만큼 세종의 말에 동의하지만, 정기준의 말을 듣고 그 말 또한 일리가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더군요. 새로운 권력을 가진 백성, 그들이 그 권력을 남용할 경우 누가 그것을 책임질 것인가...누구나 글을 알고 쓰는 지금,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쓴 악플에 의해 피해를 입고, 목숨을 잃는 일이 빈번하지만, 그걸 책임지는 사람은 없죠. 그런면에서는 정기준의 우려가 일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기준이 소양있다고 생각했던, 삼강오륜을 알고 유학을 아는 사대부도 말을 지어내어 서로를 공격했던 일을 떠올리면 좀 우습긴 합니다만...아무래도 그 대책은 국민 스스로 견제하여 자정작용을 하는 것 밖에 없겠지요. 글과는 조금 동떨어진 얘기지만, 드라마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라 글을 씁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뿌나 화이팅!!

    • 저도요 2011.12.09 06:31 address edit & del

      여전히 정기준의 말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뿌나의 세종과 정기준이 그리던 한글이 다 알려진 세상에 사는 한 사람으로써 정기준은 정말로 틀렸다고 생각해요. 밤길의 애인을 책임지기 싫어 데려다 주는 대신 칼을 쥐어주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정기준은 말했지만, 세종의 애인은 한 명이 아니라 수천 수만명이니까요. 그들을 모두 안전하게 되돌아가도록 매일 집에 데려다줄 수도 없고 데려다 주지 못한 애인 중에 죽은 애인을 보고 그래도 난 할만큼 다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권력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애시당초 모두 데려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주는 것이 옳은 생각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애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제멋대로 단정하고 제 보호만을 기다리는 연약한 연인들로 만드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애인을 생각하는 사람이 할 일입니다. 사실 정기준이 말한 애인이 한명이라고 해도 애인을 내내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애인을 지키다가는 다른 아무 일도 못해서 정작 애인이 배고프다고 해도 밥한끼 제대로 사주지 못한 채 같이 동반 아사하거나 아사 위험을 수반하고라도 그 옆을 지킨다한들 잠시 화장실 간 새에 나쁜 놈 손에 죽어버릴 수 있지요. (물론 역시나 애인이 정기준 말마따나 그렇게 무기력한 존재라면 몸을 지켜주는 것말고 다른 것을 돌봐주는 것도 역시 애인을 둔 남자가 해야할 일일텐데 말이지요.) 그럴 바에야 애초에 호신술도 가르쳐주고 애인없이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길도 잘 마련해주는 것이 낫지요. 그저 애인이 아무리 힘들고 배고파도 내 도움만 바라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욕입니다. 애인이 자신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면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예전에 여자의 팔다리를 잘라 자신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 옆에 두던 끔찍한 남자같은 사람이 바로 정기준이 말하는 권력이군요. 애초에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무지입니다. 다만 "권력은 책임이다"라는 말만은 맞지만 권력자만이 책임을 질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잘못된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도요 2011.12.09 06:39 address edit & del

      글이나 성리학이나 불교를 몰라도 소양이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다 알아도 소양이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요. 요새 우리나라는 그저 돈벌고 명예쌓는 것만이 중요하니 학벌 쌓고 좋은 직장만 들어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부모(식당예절조차 모르는 이기적인 애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널려있어요.

      소양을 모르는 자가 글을 쓰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동의하지만, 그건 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책임은 글을 쓴 자, 그리고 그 글을 쓴 자를 키운 사회와 가정, 학교 등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글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말이지요. 칼로 칼을 막듯 글로 악플러를 막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요. 마치 음식냄새만 조금만 나도 파리처럼 여기저기 꼬이지만, 댓글의 대세가 악플러를 비난하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더군요. (반면 비슷한 악플러 무리가 조금만 동조해주면 신나서 서로서로 더 난리를 치더군요.) 전반적인 인터넷 에티켓은 네티즌 스스로 자정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3. 저도요 2011.12.09 06:29 address edit & del reply

    처음에 감탄한 것은 뿌나에 묘사된 세종의 방식-기득권이란 다름이 아닌 정보를 독점하는 세력이고 이 정보를 널리 나눌 기회를 주어 기득권을 견제한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라지만 아비(태종)이 열심히 칼에 피를 묻혀 나름 세종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뒤에 등극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떻게 세상을 차릴지 잔뜩 준비를 하고 있었을텐데 기득권들이 잔뜩 엉망진창으로 온 바닥까지 널부러진 엎어진 밥상(imf)부터 치우느라 짧은 임기 안에 새 상은 얼마 차리지도 못 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밥상을 엎은 것들이 새상 차리는 것까지 방해해대는 상황이었지요. 또한 상을 치우는 동안에도 뭘 먹어야한다고 난리를 치니 상치우고 새 상 차리는 것뿐만 아니라 대충 상없이 밥이라도 먹여야 하는 상황이랄까?) 하지만, 이 난리 속에서도 IT산업을 육성하고 내용(솔직히 소프트웨어쪽은 리눅스보다 윈도우 일변도인 것만 봐도 그닥 풍성한 편은 아니었습니다)은 어떻든 인터넷망하나는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는 말을 들을 만큼 잘 깔아놓았습니다. (정보산업육성이 김대중 대통령만의 업적은 아니겠으나 그가 이 산업을 육성하고자 많은 지원을 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거라 봅니다.)

    세종이 어려운 한문 대신 쉬운 한글을 주어 자로를 열고자 했다면 한참 후대의 김대중은 인터넷망을 통해 그간 언론이라는 기관을 독점하여 정보를 독점하고자 했던 기득권에 대항하여 국민(백성)이 스스로 정보를 만들고 이를 나를 수 있는 통로를 준 것이지요. 비록 기득권이 이후에도 한자 중심의 관료사회를 지킬 수 있었지만 한번 퍼진 언문과 이를 쓰는 백성을 다 막을 수 없었듯이, 지금의 정권을 다시 찾은 기득권도 이런 저런 통제를 가하지만 한번 퍼진 인터넷망을 다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이나 이번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이렇게 구축된 국민들의 정보망이 스스로 꽤 큰 역할을 한 것을 보면 뭐랄까 세종대왕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견지명을 느끼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이나 재물이 아닌 정보의 독점을 방지하여 기득권을 견제하고자 했음이 말이지요. 아마 페이스북 같은 sns의 대부분이 외국산이지 않느냐고 반론을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좋은 외국산이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에 기존에 인터넷망이나 정보산업의 하드웨어가 잘 되어있지 않다면, 그리고 위대하신 세종대왕의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이다지 빨리 외국산 프로그램의 덕을 볼 수 있었을까 모르겠어요. 중국애들 자판 쓰는 걸 보면 불쌍하기까지 하지요. 지들 음을 적으면 한자가 뜨고 그 중 고르고 있어요. 경지에 이르면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각각 다른 문자메세지를 보내는 아이들마저 있다고 이르는 우리나라와는 판이하지요. 핸드폰이 안 터지는 곳이 수두룩한 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핸드폰 천국이지요. 미국은 오죽하면 핸드폰이 어디서나 잘 터진다는 광고가 잘 나가는 핸드폰 회사의 광고가 되지 않나, 실제로 낚시 전문 관광마을에 놀러갔을 때 아이들이 가자마자 한 것은 온 마을을 걸어다니며 핸드폰이 켜지는 곳을 찾는 것이었다거나, 제 친구는 핸드폰을 침실에서만 쓴다거나 어떤 애는 창문가에서만 터진다고 창문에 붙어서 전화를 걸거나 (이것도 광고로 있었지요.) 저만 해도 당시 소도시에 가면서 핸드폰이 필요해서 하나 장만해서 갔더니 하필 그 회사는 그 지역 서비스가 안 되어서 (회사에 따라 서비스 지역이 다른 줄 모르고 아무 회사거나 들고간 내 탓이지만) 공중전화 찾느라 바빴던 슬픈 기억이 있지요. 아무튼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인터넷망이라든가 핸드폰 시스템은 잘 된 나라라는 게 절실히 느껴져요. 온사방에 수두룩한 피씨방들도 초창기 빠른 컴퓨터 확산에 도움을 주었지요.

    중요한 건 세종대왕이나 전 김대중 대통령이나 기득권의 정보의 독점을 타파하려 했다는 것이지요.
    세종대왕의 업적이 실제로 가장 문맹률이 적은 나라를 만들어졌고, 김대중 대통령 등의 노력으로 더이상 기존의 언론에만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언론을 만들고 전달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정기준의 말도 맞는 것이 있더군요. 글은 칼보다 무서워서 소양을 갖춘 자들이 써야한다. 이건 우리나라에 들끓는 악플러들과 그들의 업적으로 실제로 자살마저 하는 사람들을 보면 맞는 말이지요. 소양 없는 자들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과 잘 갖추어진 인터넷망으로 칼처럼 글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정기준의 말처럼 세종대왕도 김대중 대통령도 이제 와 이런 이들을 책임질 수도 통제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여전히 정기준의 말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뿌나의 세종과 정기준이 그리던 한글이 다 알려진 세상에 사는 한 사람으로써 정기준은 정말로 틀렸다고 생각해요. 밤길의 애인을 책임지기 싫어 데려다 주는 대신 칼을 쥐어주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정기준은 말했지만, 세종의 애인은 한 명이 아니라 수천 수만명이니까요. 그들을 모두 안전하게 되돌아가도록 매일 집에 데려다줄 수도 없고 데려다 주지 못한 애인 중에 죽은 애인을 보고 그래도 난 할만큼 다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권력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애시당초 모두 데려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주는 것이 옳은 생각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애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다고 제멋대로 단정하고 제 보호만을 기다리는 연약한 연인들로 만드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애인을 생각하는 사람이 할 일입니다. 사실 정기준이 말한 애인이 한명이라고 해도 애인을 내내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애인을 지키다가는 다른 아무 일도 못해서 정작 애인이 배고프다고 해도 밥한끼 제대로 사주지 못한 채 같이 동반 아사하거나 아사 위험을 수반하고라도 그 옆을 지킨다한들 잠시 화장실 간 새에 나쁜 놈 손에 죽어버릴 수 있지요. (물론 역시나 애인이 정기준 말마따나 그렇게 무기력한 존재라면 몸을 지켜주는 것말고 다른 것을 돌봐주는 것도 역시 애인을 둔 남자가 해야할 일일텐데 말이지요.) 그럴 바에야 애초에 호신술도 가르쳐주고 애인없이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길도 잘 마련해주는 것이 낫지요. 그저 애인이 아무리 힘들고 배고파도 내 도움만 바라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소유욕입니다. 애인이 자신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으면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마치 예전에 여자의 팔다리를 잘라 자신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 옆에 두던 끔찍한 남자같은 사람이 바로 정기준이 말하는 권력이군요. 애초에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고 무지입니다. 다만 "권력은 책임이다"라는 말만은 맞는 말이지만요.

    글이나 성리학이나 불교를 몰라도 소양이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다 알아도 소양이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요. 요새 우리나라는 그저 돈벌고 명예쌓는 것만이 중요하니 학벌 쌓고 좋은 직장만 들어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부모(식당예절조차 모르는 이기적인 애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널려있어요. 그건 세종대왕의 탓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탓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의 마음가짐 탓인 듯 싶어요. 악플러도 세종대왕의 탓도 김대중 대통령의 탓도 아니겠지요.

    세종이 숨은 속마음(아무리 해주어도 떼쓰는 백성이 귀찮다)만 지적당하지 않았어도 정기준에게 멋지게 반박을 해주었을텐데 아쉽고 아쉽네요.

    정기준이 뿌나의 끝에 어찌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훗날 조선은 결국 정기준이 원하던 대로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끝에 정기준이 저 생각을 좀 후회하면 좋겠는데.... 그럴 것 같지가 않네요. 아무튼 훌륭한 지도자를 간간히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허튼 지도자들도 있었지만) 우리 나라의 복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