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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아랑사또전 18회-이준기와 신민아가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이유?

by 자이미 201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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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를 남긴 <아랑사또전>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최대감에 의해 옥에 갇힌 사또 은오가 극적으로 풀려나고, 아랑이 사랑하는 은오를 위해 스스로 요괴가 되기로 작정하면 다음 주 마지막 이야기가 어떻게 정리될지 궁금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준기 같은 정치인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달라질 것이다

 

 

 

 

 

은오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최대감은 모함을 통해 그를 옥에 가두고 맙니다. 얼자 출신이 자신의 출신과 비슷한 이들을 모아 반란을 꿈꾸었다는 죄목으로 처형을 앞둔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출신과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그는 당시(현재라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에는 분명 죄가 될 수밖에는 없었으니 말입니다.

 

밀양 사또 은오가 최대감에 의해 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놀라고 분노한 것은 다름 아닌 백성들이었습니다. 최대감의 악행으로 죽기보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그들에게 사또는 생명의 은인과 다름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사또가 최대감의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갇혔다는 소식은 당황스럽게 다가올 뿐입니다.  

최대감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은오가 고생하는 사이 아랑은 무연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은오의 어머니를 찾아주기 위해 직접 나선 아랑은 어떻게 은오 어머니의 몸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묻습니다. 은오 어머니가 가장 갈망했던 것이 바로 최대감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신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이라 말하는 무연은 아랑의 몸을 탐하기 위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만 그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이런 설정은 곧 아랑과 은오의 사랑이 슬픔이 아닌 행복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랑이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랑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인간의 몸으로 은오와 백년해로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연은 그 청을 들어줘야만 아랑의 몸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 간극 속에서 아랑과 은오의 해피엔딩을 추론하는 것이 조금은 억지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충분한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그동안 무연이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욕망은 최대감 같은 탐욕스러운 존재를 만들지만, 건강한 욕망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연의 역할은 흥미롭기만 합니다.

 

무연과 같은 악마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인간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악마가 수백 년 동안 인간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인간의 터무니없는 탐욕이 넘쳤기 때문이라는 <아랑사또전>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는 없습니다.

 

밀양 지역의 세도가들 모두 무연을 위해 일을 하고 얻은 권력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을 비꼬고 비판하는 <아랑사또전>은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현대 사회는 비대한 탐욕과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수의 가진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탐욕은 범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탐욕과의 전쟁의 근원과 이유를 보여주는 무연의 모습은 그래서 잔인하고 잔혹하기만 합니다.

 

참형에 처해지려는 은오를 살린 것은 아버지 김 대감이었습니다. 어명을 가지고 밀양에 도착한 김 대감은 은오를 살리고 최대감을 몰락으로 이끕니다. 이 과정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은오를 살린 것이 밀양 상황을 파발로 보내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진행되는 시간의 경과는 삭제된 채 어명을 받아 은오를 살리는 과정은 긴박함보다는 주인공이기에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밖에는 없었으니 말입니다.

 

과정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백성들을 위한 수령을 위하 어명으로 은오의 자리가 보전되는 과정은 흥미롭기만 했습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정치적인 행보가 드라마라는 틀을 이용해 전해졌다는 점은 비록 만들어진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반갑기만 하니 말입니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와 탐관오리 최 대감의 악행을 뿌리 뽑겠다는 은오의 다짐에 아버지인 김 대감은 "흐르기 시작한 물은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한 백성들의 강한 분노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하니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재자와 같은 만행을 저질러온 최 대감에게 당하면서도 감히 반항도 할 수 없었던 백성들. 그런 그들에게 은오라는 존재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재상인 김응부 대감의 아들(비록 얼자 출신이라 하지만)이 고을 사또가 되면서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탐관오리를 벌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돕는 사또의 등장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했고, 결과적으로 세상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아랑사또전>은 인간의 욕심이라는 틀 속에서 다양한 가치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근원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결코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양한 함의들을 담은 이야기들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랑사또전>이 좀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뚜렷한 선악구조와 응징이라는 단순 코드에 아랑을 사이에 둔 은오와 주왈의 삼각관계가 극대화되어야만 했습니다. 권선징악을 극대화시키고, 단순한 삼각관계를 통해 시청자들의 즉각적인 관심을 끌어냈다면 <아랑사또전>은 큰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단순한 논리를 벗어나 제법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은 약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최대감의 악행은 결국 인과응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극중에서도 방울과 아랑이 이야기를 나누듯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놈은 떵떵거리고 살고, 그런 나쁜 놈을 잡으려는 은오는 옥에 갇히는 억울한 세상이 어디 있느냐는 분노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실입니다.

 

인간의 잘못된 욕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아랑사또전>은 마지막 2회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은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떠난 아랑. 그런 아랑이 남긴 편지에는 은오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가득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그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아랑. 그런 아랑을 절대 그렇게 보낼 수 없는 은오의 선택이 어떻게 될지 흥미롭습니다.

 

무연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과연 은오와 아랑에게 해피엔딩을 주게 될지도 궁금해집니다. 그 간극을 이용해 아랑은 인간이 되고 무연은 사라지게 만든다면 모두가 만족해할 해피엔딩이 될 테니 말입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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