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0. 09:31

송곳 12회-지현우의 눈물,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은 더 참혹해지고 있다

푸르미 마트 일동점을 중심으로 펼쳐진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송곳>은 12번의 이야기로 끝났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현실 속 노동 환경은 변함없고 이에 맞서 싸우려는 노조의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15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현재 시점과 크게 다르지 않는 <송곳>은 그래서 더 처참함으로 다가왔다. 

 

송곳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수인의 끝없는 투쟁, 거대 담론이 아닌 생활 속 투쟁으로 지속될 뿐이다

 

 

 

푸르미 마트 일동점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파업이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현재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악랄한 방식으로 노조를 파괴하려는 사측에 맞서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은 파업이다. 

 

 

인사상무가 바라는 것 역시 파업이다. 어차피 파업을 빌미로 노조원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면 그만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그들의 노조 방어는 그런 식이거나 더욱 악랄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푸르미 마트의 파업을 위해 수인은 어쩔 수 없이 노조위원장이 원하는 주 소장과 함께 파업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수인과 주 소장 간의 충돌은 수시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대의를 위해 푸르미 마트 노조의 파업을 적극 활용하려는 주 소장과 달리, 수인은 마트 노조원들을 위한 파업을 원하고 있었다.

 

노조 위원장은 철저하게 주 소장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으니 모든 것은 그와 상의하라고 떠넘기기만 할 뿐이다. 이미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악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강조한다. 비노조원을 막는 노조원들 앞에 나서 비노조원들이 출근할 수 있도록 길을 터달라는 수인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노조원들의 모습은 처량함으로 다가온다.

 

강력하게 파업을 주도해 사측을 꼼짝 못하게 하겠다는 주 소장과 달리, 비노조원들과 노조원들의 관계를 무너트리면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진 수인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사측은 노조원들에게 통장 압류를 시도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 그마저도 아껴 모아둔 통장마저 압류를 당한 노조원들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무너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남편의 병원비를 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딸에게 손을 다시 벌리는 엄마. 노조의 필요성과 그 분노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녀 역시 딸의 눈물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노조 일에 앞장섰던 그녀는 파업 조끼를 벗고 정상 출근을 했다. 자신으로 인해 딸이 신용불량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료 노조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보내줘야만 했다. 살기 위해 하는 파업에서 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일을 해야 하는 그녀의 마음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르미 마트 노조를 시작하게 한 이유가 되기도 했던 황 주임마저 노조 탈퇴를 하고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미 회사에서 해고되었지만 지회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던 주 주임은 오랜 친구인 황 주임에게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 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결혼을 앞둔 신부를 위해 그리고 부모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홀로 모든 수모를 받아내고 이겨내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보다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노동자에게 왜 배신을 했냐고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없다. 누가 감히 그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오를 찍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노조를 위한 노조를 하는 주 소장 역시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성 노조로 잘못된 노동 환경을 바로잡겠다는 그들의 의지 역시 비난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노동자들이 괴물들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의식을 고취하고 보다 강력한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며 두려움에 떨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칼을 들고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절실하다. 

 

 

 

수인이 주 소장의 이런 대의명분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모든 것을 걸고 파업에 나선 노조원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과 각성을 통해 괴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단단한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은 장기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지만, 푸르미 마트 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성된 선진 노동자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 소장에게 노조원들 앞에서 직접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느냐는 반문에는 입을 닫았다. 누구보다 노조 활동을 잘 알고 있는 주 소장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사상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극과 극의 위치에 서 있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노동자는 그저 장기판의 말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정 부장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위해 그리고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푸르미 마트에서 최선을 다했다. 어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정 부장은 참아냈고 손가락을 다쳐 불구가 되는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회사만 생각했다. 그런 그를 눈여겨 본 인사상무에 의해 정 부장은 평사원에서 부장까지 올라서는 성공을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정 부장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럴 듯한 학벌도 없이 노동자로 입사해 관리직까지 올라선 정 부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 그 자리까이 올라섰다. 퇴근 시간과 상관없이 회사에서 일을 했고 아들 입학식과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해도 인사상무 아들 졸업식에 꽃다발을 들고 가는 일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황 주임이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굴욕적인 상황을 받아들인 것처럼 정 부장도 철저하게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받쳤다.

 

믿었던 인사상무가 자신을 내치는 상황에서 정 부장은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악랄한 고 과장마저 포기했던 일을 정 부장은 앞장서 진행했다. 노조 천막에 들이닥친 깡패들로 인해 쑥대밭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수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순했다.

 

노조원들을 지키기 위해 수인은 간부들만 파업에 나서고 일반 노조원들은 업무에 복귀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노예로 남을 것이냐는 불편한 분노와 감옥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 소장의 강성 발언에 "더 나은 감옥을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걸 하겠다"는 수인은 주 소장을 보내기 위해 푸르미 마트 노조위원장을 물러나게 만든다.

 

 

현장에 남아 단식투쟁까지 한 수인은 결국 모든 파업 노동자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그들의 체불임금도 모두 받아냈고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 한직으로 물러나는 것까지 동의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떠난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긴 시간 힘겨웠던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사무용 컴퓨터 조차 없는 사무 환경 속에서도 그가 즐겁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투쟁이 실패하지 않았음을 느꼈을 때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열심히 일만 했던 그들이 수인에게 보낸 메일은 감동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대의를 위한 노동 운동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투쟁. 삶과 맞닿은 곳에서 매일이 투쟁인 그들에게 수인은 누구보다 든든한 동지이자 거대한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2개월이 지난 후 푸르미 마트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수인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들어 놓은 노동 환경 속에서 그들은 열심히 일을 했고, 노조 파괴에 앞장섰던 정 부장은 다시 사회로 나왔지만 그저 초라한 모습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쳤던 마트를 돌아보고 바닥에 붙은 종이를 뜯어내는 행동으로 그의 여전한 회사 사랑은 증명되었지만 그 무엇도 그에게는 남겨진 것이 없었다.

 

인사상무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한 그는 장기판 졸로 장렬하지도 못하게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노동환경은 바뀌고 있다. 그리고 사회도 변화하고 있다. 거대 담론을 앞세우며 투쟁을 해왔던 노동 운동 현장에서도 비정규직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같은 노동자이지만 정규직만을 위한 노동운동의 한계는 결국 고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송곳>의 이수인이 선택이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면서도 반가운 이유는 정규직만을 위한 노동 운동은 결과적으로 고립과 분노만 키우고 노조를 옥죄는 이유가 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변해야만 진정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주 소장의 강성 노조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희생들이 결국 최악의 노동 환경을 바꾸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이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는 현 정부가 강압적으로 진행하는 '노동 유연성'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국노총이 정부 손을 잡고 만든 이 한심한 노동계악은 결과적으로 모든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 운동은 선거 운동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정치꾼들을 바꾸지 않으면 결국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대리인들을 뽑고 그들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매커니즘 속에서 선거를 외면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은 가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노동 운동 역시 변화는 절실하다. 모든 노동자들을 '종' 정도로 취급하는 정치꾼들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노사가 보다 가까워지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썩어 문드러진 정치판을 바꾸는 것일 것이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바꾸려 노력하는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은 바뀐다. 이수인 과장이 자신을 잊지 않는 푸르미 노동자들의 메일을 받고 프랑스 본사에 메일을 보내는 장면에서 그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책상에 컴퓨터가 없다는 말로 시작된 그의 노동 운동은 다시 그렇게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실제 존재하던 까르푸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 환경이 대폭 강화되거나 좋아졌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없다. 하나를 무너트리면 다른 더 강한 자들은 이 모든 것을 흡수해 새로운 괴물로 탄생하고는 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정치 변화를 이끌 정치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꾼들을 제대로 뽑는 것은 국민들의 의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얼마나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너무 지독하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변인인 정치꾼들만 제대로 뽑아도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하고 행복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드라마 <송곳>은 그렇게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끝났다. 하지만 남겨진 우의 삶은 여전히 참혹하기만 하다.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우리 스스로 송곳이 되지 않는 한 세상은 변할 수 없다는 사실 만큼은 불변의 진리처럼 다가온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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