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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육룡이 나르샤 37화-이방원 정도전 잔인한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by 자이미 201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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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이성계 일파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는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 그는 조선을 건국하는 이유를 만들어냈지만 그는 그 일로 인해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적장을 죽였지만, 그 일로 인해 이방원은 스승에게 역적으로 몰렸다. 이방원이 왜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야만 했는지를 드라마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었다. 

 

이방원과 정도전의 악연;

이성계 왕 즉위, 이상과 현실 사이 야망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맞서 '단심가'를 외친 포은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철퇴에 맞아 숨졌다. 그 일로 인해 모든 것은 급격하게 달라졌다. 고려를 유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포은이 죽은 직후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포은 하나를 믿고 왕의 자리에 올랐던 그에게는 이성계를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삼봉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기 위해 이방원과 이성계를 분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성계의 나라는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포은의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은 이방원의 잘못으로만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이방원의 마음속에는 지독한 분노도 함께 싹트기 시작했다.

 

무휼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척사광은 포은이 죽었다는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공양왕이 안전하다는 이야기와 이제 곧 왕위에서 내려올 것이라는 말에 오히려 반가워했다.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들은 그렇게 서로 행복해질 수 있는 지금이 더 행복했으니 말이다.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복수도 하지 않는다며 떠난 척사광.

 

식사를 하고 있는 정도전을 은밀하게 찾은 무명 연향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눈다. 정도전의 운명을 알 수 있게 하는 이들의 대화는 흥미로웠다. 계민수전을 막는 무명에 맞서는 정도전. 그의 개혁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무명은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정도전은 죽는다. 역사가 이야기하는 이 과정에서 무명은 중요함으로 다가온다.

 

무명의 신념은 "인간은 이를 쫓고 시대는 인간을 쫓는다"라고 했다. 인간의 욕망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발전도 있을 수 없다는 연향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야기하는 계민수전 역시 나쁘다 주장할 수 없다.

 

 

모든 토지를 압수해 국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그들의 욕망은 유자의 교육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정도전의 욕망은 이상적이지만 그게 나쁘다 주장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쩌면 무명이 주장하듯 '이'를 쫓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적당한 욕망은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발전을 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만이 지배하는 세상은 곧 몰락을 자초하는 이유가 된다. 어느 권력이나 국가의 몰락에도 인간의 탐욕이 결국 모든 것을 망치는 이유가 되었다는 점에서 삼봉의 계민수전을 통해 평등이 하나의 해법으로 자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나라도 삼봉의 꿈처럼 평등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게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은 생길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 <육룡이 나르샤>의 중요한 화두다.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정도전과 현실을 직시하는 이방원의 대립은 그래서 흥미롭다. 무명은 정도전에 맞서기 위해 이방원을 도울 수밖에 없다. 이방원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명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이방원의 사상은 정도전보다는 무명과 더욱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극단적인 그 어느 지점에 머물 수는 없다. 그 중간에서 서로의 이점들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현실의 정치 체계 등 모든 것은 그 가운데 무게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느 시대에는 인간의 욕망이 더욱 큰 가치로 다가오고, 평등으로 무게 중심이 더 쏠리는 모습들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속전속결로 포은은 역적이 되어 효수가 되었고, 공양왕은 수순에 따라 왕위를 이성계에게 물려주고 유배를 당했다. 더는 물리칠 이유가 없게 된 이성계는 왕이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이미 수백 년을 이어 온 체계가 왕이 바뀌었다고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생들이 이성계와 정도전을 외면하고 관직을 내려놓고 사라지며 국가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음서제를 폐지하고 과거를 도입해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능력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제도 역시 시간이 필요했다. 과거를 치를 만한 유생들이 모두 이성계의 나라에 반박하는 현실 속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도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이 바뀐 후 첫 과거 시험이 치러지는 날. 과거시험장은 텅 비었다. 누구도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전국의 유생들은 포은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그들에 동조할 수 없었다. 나무에 갓을 거는 괘관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했고, 두문동이라 명한 장소에서 모여 살며 세상과 등을 진 유생들은 큰 적으로 남겨질 수밖에는 없었다. 

 

포은이 삼봉을 막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이방원이 전면에 나섰다. 병사를 동원해 그들을 죽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시 움직인 것은 이방원이었다. 그는 현장을 찾아 강경책을 선언했다. 유생들과 대화는 하겠지만 우선 두문동을 불 태워버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과만 이야기를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유생들이 모르는 사이 불을 질러 도륙을 했다면 미친 짓이지만 선전포고를 해서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다. 이를 통해 기 싸움에서 이긴 이방원이 조선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드라마 속 이방원은 매력적인 존재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가 포은과 삼봉이라는 당대 최고의 존재들을 죽이고,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들을 죽인 후 스스로 왕이 되는 과정이 옹호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시에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그런 상대의 죽음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이방원이라는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포악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로도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은 역사가 적었던 것처럼 극단적인 결과를 남겼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죽기 전까지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심지어 이성계가 이방원을 직접 죽이기 위해 활을 쏠 정도로 분노했다. 그런 역사의 기록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흥미롭게 재해석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이라는 비밀조직을 이용해 역사가 모두 기록하지 못한 틈을 채우고 이를 통해 왜 이방원이 그런 역사적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어야 했던 이방원. 우리 역사에 가장 위대한 왕으로 이야기되는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그는 왜 역사가 증오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는지를 드라마는 색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방원에 의해 포은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려졌다. 하지만 정도전은 참혹하게 죽은 후 조선시대 내내 역전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 <육룡이 나르샤>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누구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라는 합리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새로운 나라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뜻을 품은 그들은 그렇게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피의 역사는 다시 한 번 잔인한 피를 요구하고 있다.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척사광과 이방지의 운명적인 대결도 벌어질 수밖에는 없어 보인다.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척사광의 바람과 달리, 그들의 운명은 최고를 가리게 요구하니 말이다. 

 

무명이 척사광을 찾고 이성계는 폐위된 왕을 죽인다. 그 과정에서 척사광이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리가 없다. 여기에 홍대홍이 놀란 척사광 권법의 약점은 이방지의 놀라운 무술 솜씨를 통해 얻어진 그 결과는 곧 척사광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이들은 운명은 우리는 알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속에서 시청자들을 흥미롭게 이끄는 <육룡이 나르샤>는 그래서 대단하다. 역사가 모두 기록하지 못한 틈을 채워내는 작가의 상상력은 시청자들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렇게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피의 역사는 이제 다시 시작되려 한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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