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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cast 방송이야기/Broadcast 방송

거리의 만찬 ep21-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死生을 이야기 하다

by 자이미 2019.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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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이 된 제주 4. 3 학살. 우린 얼마나 그 일을 알고 있을까? 관심을 가진 이들은 제법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세상에 알려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잔혹했던 학살의 현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섬 제주였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제주는 슬픔의 섬이었다.

 

양희은의 노래 '4월'은 의미가 컸다. 4월 왜 그토록 이 땅은 뜨겁고 아프고 슬펐는지. 그 노래는 서글프게 4월이면 아프게 흘러나오고는 한다. 그렇게 양희은이 새로운 MC로 합류해 찾은 제주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4.3 항쟁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이들과 만남은 그 자체로 특별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세계 그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참혹한 학살의 시간들이었다. 그 기간 동안 제주 인구의 10%가 한국군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학살당했다. 나이와 성별도 따지지 않고 제주에 살고 있는 주민이라면 죽였다.

 

한반도가 아닌 남한에서만 강행된 선거에 부정적인 의견이 나온 제주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렇게 제주로 들어온 군인과 서북청년단은 잔인하게 주민들을 학살했다. 빨갱이를 잡는단 이유로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그들은 그저 살인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북촌리. 그곳에서 살아남은 고완순 씨는 48년 4월 3일 겨우 9살이었다. 갑자기 쳐들어온 군인들은 고완순 씨 가족을 모두 북촌 초등학교로 끌고 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학교 운동장에는 마을 주민 천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운동장에 선을 그어 공무원과 경찰 가족들과 일반 주민들을 나눴다고 한다. 친일파 경찰들은 보호하고, 제주도민이라는 이유로 운동장에서 군인들은 총을 난사했다. 그렇게 '북촌리 학살'은 벌어졌다. 한 마을을 초토화 시킨 국군은 누구를 위한 군인인가?

 

고완순 씨의 3살 동생은 운다는 이유로 군인에게 머리를 집중적으로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겨우 세살이다. 그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고 있겠는가? 제주도민들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편을 나누고 적이라 생각하면 어린아이들까지 학살한 그들이 과연 정상적이었을까? 그들은 괴물이었다.

 

미군정 시절 친일파 청산보다는 그들을 관료로서 우대하며 대한민국의 역사는 엉망이 되었다. 친일파들은 그렇게 더욱 애절하게 '빨갱이 몰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서는 뭔가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 친일파의 흔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들의 논리 역시 우리 사회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친일을 하던 자들은 얼굴을 바꿔 친미를 하고, 그렇게 독재를 찬양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후손들은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정치꾼이 되거도 하고 사업가, 법률가 등으로 성장해 자신의 뿌리를 이어가기 위해 선동질에 앞장선다. 이게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된 리사이클 현상이다.

 

제주 학살에 나선 군인과 서북청년단을 피해 많은 이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작은 동굴들 속으로 들어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목시물굴'은 기존 우리가 알고 있는 동굴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가 겨우 버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서 두 달 가까이 숨어야 했던 그들에게 그 모든 시간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동굴 속에서 아이를 낳은 엄마는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가슴에 묻어 하늘로 보내야 했다. 아이 울음 소리로 인해 모두가 발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이 심한 이들은 노약자 들일 수밖에 없다. 한국 군인들을 피해 피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저항 능력도 없는 노약자들이었다.

 

너무 어린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다.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은 그나마 감사한 일이었다. 죽창으로 잔인하게 학살한 자들에게 그 과정은 하나의 유희였는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의 엉덩이만 잔인하게 찔러서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는 증언을 들으며 과연 그게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화풀이 살인을 국가가 직접 지시해서 자행된 것이 바로 '제주 4.3'의 진실이다. 당시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는 3만 명의 주민들이 과연 모두 빨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그들은 흑백 논리에 휩싸이지 않은 평범한 이들이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고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다른 이도 아닌 한국군과 동포들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한 것이 바로 그 당시 제주도민들이었다.

 

이제는 관광지로 모두가 가고 싶은 곳이지만 그 땅에는 수많은 제주도민의 피가 스며있다. 제주를 상징하는 몸국과 톳보리밥에 얽힌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쓰리게 다가온다. 제주도민들은 '4.3'을 '死生'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언어유희 같은 방식이지만 숫자와 한자의 의미 속에는 그 시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제주도민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학살을 당해야 했던 현실. 그럼에도 제주의 4.3 항쟁은 제대로 평가 받기 힘들었다. 오랜 시간 '제주 4.3' 자체를 외면해야 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독재자에게 제주는 여전히 '빨갱이 섬'이었고, 그들의 후손과 지지자들에게도 동일한 공간일 뿐이었다.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잔인한 학살이 벌어진 제주. 총을 사용하는 것도 아깝다며 죽창으로 학살한 군인과 친일 경찰과 서북청년단. 그들에게 제주도민들은 잔인한 살인게임을 하기에 유용한 목표들이었다. 잔인한 살인마들은 훈장을 받고, 그렇게 후손들은 여전히 잘 산다.

 

제주도민들의 피를 양분삼아 살아가는 그들은 여전히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그 서글픈 역사는 그렇게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과거 청산은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전히 그 진실을 두려워하고 막는 자들은 많다. 권력과 돈으로 무장한 그 집단은 여전히 자신들의 '꺼삐딴 리' 같은 삶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린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와 다른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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