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7 10:13

손석희의 앵커브리핑-빈부를 가른 옥수수빵과 냄새

빈부의 차이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현대 사회가 그 폭이 확장되는 속도가 빠를 뿐 빈부격차는 심각한 수준으로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 사회의 건강성은 급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경고등이 반복적으로 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급을 현실적으로 올리는 것조차 강력한 저항에 시달려야 했다. 시급 1만 원 시대면 국가가 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특정 정치 집단과 일부 언론의 몰아가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노동자의 임금 올라가는 것은 문제지만 재벌 독식은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 무장은 우리 사회 빈부 격차 좁히기가 쉽지 않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점심때마다 학교에서는 옥수수빵이 나왔습니다. 한 반에 30명 정도가 그 옥수수빵을 받아먹었지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상 배급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옥수수빵을 먹었다고 오해하시진 말길 바랍니다. 당시 한 반의 학생 수는 대략 100명 정도는 됐으니까요. 그래서 점심시간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70명 정도는 도시락, 30명 정도는 옥수수빵…"

 

"노오란 옥수수빵이 먹음직스럽다고 느낄 때도 많았고,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 빵을 먹는 게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현실은 가난한 아이들과 그 가난에서 겨우 벗어나 있는 아이들을 명확하게 갈라주는 것이 바로 그 옥수수빵이었습니다.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 중에는 우유를 먹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달에 당시 돈으로 천 원 정도를 내면 매일 우유가 나왔습니다. 물론, 돈을 내지 않으면 우유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정해서 말씀드리자면, 점심시간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이렇게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도시락과 우유를 먹는 아이들… 도시락만 먹는 아이들… 그리고 옥수수빵만 먹는 아이들… 이것은 그냥 겉으로 드러난 풍경일 뿐… 아이들의 마음속은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옥수수빵으로 갈린 빈부의 격차는 부모 세대 혹은 이제는 조부모 세대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한 반에 100명 정도 되는 학생이 있던 시절. 도시락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은 옥수수빵이었다. 100명 중 30명 정도는 그렇게 도시락 대신 옥수수빵으로 식사를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무상 급식을 빨갱이나 하는 짓이라 외치는 한심한 자들 역시 그런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무상 급식을 탓하는 모습을 보면 뇌구조가 우선 궁금해진다. 최소한 아이들에게 먹는 것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복지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무슨 정치를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좁은 교실 안에서 이미 나누어져 버린 계층…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는 그렇게 가끔씩 아이들을 힘들게 합니다. 어제(5일) 보도해드린 지역아동센터도 마찬가지지요. -한부모가족 증명서, -장애인증명서, -차상위계층 확인서, -기초연금 수급자 확인서… 가난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아야 받아주는 순간… 차별과 소외는 시작됐습니다"

 

""제가 여기 다니는 거 알면 친구가 안 놀아줄까 봐…"- 지역아동센터 이용 학생. 벌써 10년 전에 정해놓은 그 기준은 이제 헌법 소원의 대상이 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옥수수빵과 우유의 얘기는 벌써 50년도 훨씬 넘은 과거의 얘기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빈부에 따른 차별의 구조는 바꾸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이전 세대의 가난은 미담 또는 자랑, 보편… 그러나 지금은 비밀이자 수치…"- 김애란 작가. 1980년생 작가 김애란은 그렇게 정의했지요. 그러나 김애란 작가의 말이 다 맞은 것은 아닙니다. 50여 년 전 교실의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가난은… 이전 세대에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역아동센터의 도움을 받기 위해 준비해야만 하는 자료들. 처참할 정도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지 적나라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절대 도와줄 수 없다는 그 도도함은 무엇을 위함인가? 기관이 나서 자신들이 도와줘야 할 대상을 찾고 어떤 합리적 방식을 동원해야 해당자들이 편하게 도움을 받을지 고민해야 한다. 

 

공무원 편의주의로 모든 것을 증명하면 서류만 보고 결과를 통보하는 그들에 대한 분노는 당연하다. 기준이 그러니 따르는 것뿐이라 항변할 수 있을 듯하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 없이 따르면 잘못에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과거 세대의 가난은 미담이나 자랑, 보편일 수 없다. 당하는 입장에서 그 모든 편견과 불균형은 불편하고 부끄러운 기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이 초대되어 짧은 대담을 가졌다. '앵커브리핑' 주제가 빈부격차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은 영화 <기생충>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배려라고 하지만 분명 중요한 화두라는 점에서 좋은 연결고리가 되었다. 손 앵커는 '옥수수빵'으로 빈부의 차이를 언급했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 <기생충>에서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인 '냄새'로 명확하게 빈부의 차이를 구분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단박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직과 수평을 통해 극심한 빈부격차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며, 특유의 냄새로 부유층과 빈곤층을 구분하고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낸 영화적 힘은 흥미로웠다.

 

'옥수수빵'이든 '냄새'가 되든 핵심은 하나다. 빈부 격차는 존재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하 생활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현실은 처참하다. 젊은 층들이 속속 지하 생활자의 자리를 채워내는 현상은 그들의 미래와도 직결된다.

 

지하 생활자의 삶이 곧 미래의 대한민국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도 암울하다. 사회가 발전하고 풍요로워지려면 빈부격차를 최소화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극심한 빈부격차는 결과적으로 국가를 빈약하게 하고 병들게 만들 뿐이다. 그 노력들은 어느 하나가 주도할 수도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법과 규칙들을 바꿔 나가는 노력은 국회의 몫이다. 무위도식하며 거액만 챙기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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