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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역사 history of drama

몰리에르 — 규칙의 시대에 태어난 반역자,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드라마

by 자이미 2026.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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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역사 — 015

몰리에르 — 규칙의 시대에 태어난 반역자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가 드라마를 지배하던 시대
— 코르네유, 라신, 그리고 모든 규칙을 비웃은 몰리에르

핵심 답변

17세기 프랑스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가 드라마를 지배한 시대입니다. 태양왕 루이 14세 치하에서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라는 세 거장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시대를 빛냈습니다. 그 중 몰리에르(Molière, 1622~1673)는 프랑스 최고의 희극 작가로, 날카로운 사회 풍자로 종교 권력과 충돌하면서도 왕의 비호 아래 걸작들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타르튀프(Tartuffe, 1664)는 종교적 위선을 정면으로 공격해 5년간 공연 금지 처분을 받았으나,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고전 희극 중 하나입니다.

1673년 2월 17일 밤, 파리 팔레루아얄 극장의 무대 위에서 한 배우가 쓰러졌다. 그는 폐결핵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공연을 강행했다. 그가 연기하던 인물은 건강염려증 환자 아르강(Argan) — 병을 상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피를 토하기 시작했을 때, 관객들은 처음에 이것이 연기인 줄 알았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날 밤 그는 집으로 실려가 숨을 거뒀다.

alt"몰리에르"
몰리에르

 

그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 세상에는 몰리에르(Molière)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극 작가. <상상의 환자(Le Malade imaginaire)> — 진짜로 아픈 사람이 연기한 상상의 병자. 그의 죽음 자체가 가장 몰리에르다운 마지막이었다.

루이 14세의 프랑스 — 드라마를 지배한 규칙들

몰리에르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이해해야 한다. 17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 왕정 국가였다. 루이 14세(Louis XIV, 재위 1643~1715)는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하며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라는 말을 남긴 인물이었다. 모든 것이 왕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야 했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1634년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이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는 프랑스어와 문학의 표준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드라마에도 엄격한 규칙을 강제했다. 012편에서 살펴본 신고전주의의 삼통일(trois unités) — 행동의 통일, 시간의 통일(24시간 이내), 장소의 통일 — 이 프랑스에서 법처럼 굳어진 것은 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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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더 세부적이었다. 비극은 왕족과 귀족을 다뤄야 했고, 희극은 중산층 이하를 다뤄야 했다. 두 장르가 섞여서는 안 됐다. 폭력 장면은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줄 수 없었다. 등장인물의 수는 제한됐고, 언어는 우아한 12음절 알렉상드랭(alexandrine) 시구(詩句)를 써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로 남긴 것들이 프랑스에서는 강제 조항이 됐다.

 

역설적으로, 이 엄격한 규칙의 시대가 프랑스 드라마의 황금기를 낳았다. 코르네유가 규칙에 도전하며 논쟁을 일으켰고, 라신이 그 규칙 안에서 완벽한 비극을 완성했으며, 몰리에르가 희극으로 그 모든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 됐다.

코르네유 — 규칙을 깬 자가 논쟁을 만들다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 1606~1684)는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선구자였다. 1637년 그는 <르 시드(Le Cid)>를 발표했다. 스페인 영웅 로드리그의 이야기로,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연인의 아버지를 결투에서 죽이고, 그 연인과의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였다.

 

<르 시드>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됐다.
alt&quot;피에르 코르네유&quot;
피에르 코르네유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프랑세즈와 비평가들은 달랐다. <르 시드>가 삼통일 법칙을 위반한다고 공격했다. 24시간 안에 일어나기에는 너무 많은 사건이 있었고, 비극과 희극의 요소가 섞여있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공식 성명을 내어 작품을 비판했다. 이것이 프랑스 드라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논쟁 '르 시드 논쟁(Querelle du Cid)'이었다.

 

코르네유는 이 논쟁 이후 더 엄격하게 규칙을 따르는 방향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규칙을 지킨 작품들이 아니라, 규칙과 씨름한 <르 시드>였다. 이 논쟁이 역설적으로 신고전주의를 프랑스 드라마의 지배적 원칙으로 굳히는 결과를 낳았다.

라신 — 규칙 안에서 완성된 비극

장 라신(Jean Racine, 1639~1699)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비극의 완성자였다.

 
라신은 신고전주의 통일 법칙을 충실히 따르며 그 안에서 집중적인 심리적 갈등과 열정의 파괴적 힘을 탐구했다. 그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에서 소재를 끌어왔으며, 코르네유보다 더 엄격한 형식과 절제된 문체를 사용했다.

 

라신의 비극은 코르네유와 대조적이었다. 코르네유가 영웅적 의지와 명예를 탐구했다면, 라신은 열정에 굴복하는 인간을 탐구했다. 그의 대표작 <페드르(Phèdre, 1677)>에서 주인공 페드르는 의붓아들 이폴리트에 대한 금지된 사랑에 사로잡혀 스스로 파멸한다. 그 사랑이 이성으로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간.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라신은 그것을 17세기 프랑스의 감수성으로 재해석했다.

alt&quot;장 라센&quot;
장 라센

 

라신의 비극들은 그리스 신화와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세네카에서 영감을 받아 소수의 고귀한 인물들 사이의 열정과 의무가 얽힌 긴장을 압축적인 구성에 담아냈으며, 등장인물들의 이중적 딜레마와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증오의 기하학적 구조에 집중했다.

 

라신이 엄격한 규칙 안에서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의 세계에 도달한 방식은, 제약이 예술의 적이 아니라 때로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2음절 알렉상드랭의 규칙적 리듬 안에 담긴 감정의 폭발은, 자유로운 형식보다 오히려 더 강력한 긴장을 만들어냈다.

구두장이 아들의 아들 — 몰리에르가 무대에 서기까지

몰리에르(1622년 1월 15일 세례, 1673년 2월 17일 사망)는 프랑스 최고의 희극 작가가 됐다.

 

본명은 장 바티스트 포클랭. 아버지는 파리에서 실내장식 직물을 파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궁정의 공식 납품상(tapissier ordinaire du Roi) 자리를 돈으로 구입했다. 아들도 이 자리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미래가 보장된 삶.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극장에 매료된 장 바티스트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예수회 학교 클레르몽 칼리지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고 법학 학위까지 취득했지만, 1643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마련해준 미래를 내던졌다. 배우 마들렌 베자르(Madeleine Béjart)와 함께 '일뤼스트르 테아트르(Illustre Théâtre)'라는 극단을 창단했다. 이때 예명을 '몰리에르'로 정했다. 귀족 집안처럼 들리는 이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는다.

alt&quot;아카데미 프랑세즈&quot;
아카데미 프랑세즈

 

파리에서의 출발은 처참했다.

 

1645년 몰리에르는 극단의 건물과 소품 빚 때문에 두 차례나 감옥에 갇혔다. 17세기 파리에서 관람객 수가 적었고 이미 두 개의 기존 극장이 있어 젊은 극단의 생존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파리를 떠나 프랑스 지방을 13년간 순회했다.

 

그러나 이 13년의 방랑이 몰리에르를 만들었다. 지방 도시들을 돌며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원리를 직접 익혔고, 관객들이 무엇에 웃고 무엇에 감동받는지를 몸으로 배웠다. 파리의 학식 있는 비평가들이 아니라 평범한 관객들의 반응이 그의 진짜 스승이었다. 그 경험이 훗날 그의 희극을 대학 출신 극작가들의 작품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든 힘이 됐다.

루이 14세 앞에서의 하룻밤 — 모든 것이 바뀐 1658년

1658년, 몰리에르의 극단이 파리로 돌아왔다. 오를레앙 공작(Philippe, Duke of Orléans, 루이 14세의 동생)의 후원 아래 루브르 궁전에서 왕 앞에 공연할 기회를 얻었다.

 

극단은 먼저 코르네유의 비극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비극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극단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몰리에르가 앞으로 나서며 왕에게 청했다 — 자신이 직접 쓴 짧은 소극 <사랑에 빠진 의사(Le Docteur amoureux)>를 공연하게 해달라고.

alt&quot;사랑에 빠진 의사&quot;
사랑에 빠진 의사

 

왕 앞에서 소극을 공연하자 연극사가 만들어졌다. 몰리에르와 그의 극단은 즉시 왕실의 지지를 받았고, 이후 나라 전체에서 인기 있는 극단이 됐다.

 

루이 14세는 몰리에르에게 팔레루아얄 극장(Théâtre du Palais-Royal) 사용권을 줬다. 왕의 후원을 얻은 몰리에르는 파리에 안착해 다음 15년간 27편의 희곡을 쏟아냈다. 작가이자 연출가이자 배우이자 극단 경영자로서 동시에 모든 역할을 소화했다.

 

루이 14세의 왕실 지원을 누린 몰리에르는 왕이 공연에 직접 참여하거나 발레를 추는 경우도 있었는데, 왕은 몰리에르의 두 번째 아이의 대부가 되기도 했다.

타르튀프 — 5년간 금지된 희극

1664년 5월 12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타르튀프(Tartuffe, ou l'Imposteur)가 초연됐다.

 
이 작품은 종교적 사기꾼 타르튀프가 독실한 척 위선을 부리며 부르주아 가정의 가장 오르공(Orgon)을 조종해 가정의 재산과 권력을 장악하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 한다는 내용이다.
alt&quot;타르튀프&quot;
타르튀프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했다. 타르튀프라는 인물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처음부터 관객에게 보여준다. 관객은 모든 것을 안다. 그러나 오르공은 속는다. 가족들이 타르튀프의 가면을 벗기려 해도 오르공은 듣지 않는다. 그 맹목적 믿음이 희극이 되고, 동시에 비극이 된다. 진실을 보여줘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타르튀프는 종교의 가면을 쓴 채 이 어리석음을 착취한다.

 

타르튀프는 종교적 경건함이 강조되던 시대에 극단적 종교적 위선을 부각시켜 성직자들의 공분을 샀고, 몰리에르를 처벌하고 작품을 금지하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파리 대주교는 작품을 보거나 읽거나 들은 사람은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왕이 처음 공연에서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당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왕이 공연 금지 명령을 내렸다.

 

몰리에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금지 기간 중 작품을 개정했고, 왕에게 탄원서를 올리며 작품의 의도를 설명했다.

 

타르튀프 금지 해제(1669)는 점점 자신감을 높여가던 왕의 정치적 주장으로 이해된다.

 

즉 종교 권력 위에 왕권이 있다는 것을 천명한 행위였다. 5년간의 금지 끝에 타르튀프는 1669년 공개 공연을 시작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타르튀프는 17세기 최대의 검열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단순히 예술과 종교의 충돌이 아니라, 왕권과 교권의 정치적 다툼이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을 더 깊이 있게 만든다."

— University of St Andrews Research Portal, Controversy in French Drama: Molière's Tartuffe and the Struggle for Influence

미장트로프 — 세상을 혐오하는 남자의 초상

타르튀프 금지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1666년, 몰리에르는 미장트로프(Le Misanthrope)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타르튀프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한다. 타르튀프가 외부의 위선자를 비웃었다면, 미장트로프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다.

alt&quot;미장트로프&quot;
미장트로프

 

주인공 알세스트(Alceste)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형식적 예의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교계의 위선을 참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직언만 한다. 그러면서도 그 자신은 사교계의 인기 여성 셀리멘(Célimène)에게 완전히 빠져 있다. 위선을 혐오하면서도 위선적인 여성을 사랑하는 역설. 알세스트는 누구보다 명확하게 세상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랑 앞에서는 눈이 먼다.

 

초연 당시 이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다. 웃음이 없는 희극, 결말이 행복하지 않은 희극을 관객들은 낯설어 했다. 그러나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몰리에르의 가장 완숙한 걸작으로 꼽는다. 몰리에르가 자신의 삶과 이 작품이 닮아있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 타르튀프 금지로 상처받고, 동료들의 배신을 경험하고, 아내의 불륜을 의심했던 몰리에르 자신이 알세스트 속에 녹아 있었다.

몰리에르가 발명한 것들 — 풍자, 부르주아, 그리고 코메디발레

몰리에르가 드라마에 가져온 혁신은 여러 층위에 걸쳐 있다.

 

첫째, 그는 부르주아를 희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신고전주의 규칙에 따르면 희극은 하층민을 다뤄야 했다. 그러나 몰리에르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부유한 중산층 시민이었다. 그는 이 계층의 허영, 어리석음, 위선을 해부했다. <수전노(L'Avare, 1669)>의 인색한 부자 아르파공, <부르주아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670)>에서 귀족이 되고 싶어하는 직물상 주르댕. 이 인물들이 몰리에르 희극의 전형이다.

alt&quot;부르주아 귀족&quot;
부르주아 귀족

 

둘째, 코메디발레(comédie-ballet)를 창안했다. 몰리에르는 루이 14세가 무용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고,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라는 작곡가와 협력해 연극에 발레와 음악을 결합하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

 

그는 희곡에 음악과 발레를 결합시켜 모든 연극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형식을 이루었는데, 이 형식은 그의 사후 계속되지 않았지만 125년 후 오페라에서, 300년 후 미국 뮤지컬 코미디에서 꽃을 피웠다.

 

셋째, 심리적으로 집요한 풍자였다. 플라우투스나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유형적 인물과 달리, 몰리에르의 인물들은 특정한 심리적 집착을 가진 존재였다. 타르튀프는 위선적이고, 아르파공은 인색하고, 주르댕은 신분 상승에 집착한다. 그 집착이 이야기 전체를 이끈다. 한 가지 결함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인물. 이것이 몰리에르 희극의 구조적 원리였다.

상상의 환자 — 마지막 무대, 가장 몰리에르다운 죽음

만년의 몰리에르는 실제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 폐결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작품을 쓰고 공연했다. 1673년, 마지막 작품 <상상의 환자(Le Malade imaginaire)>를 발표했다. 병을 상상해 의사들에게 속고 자식들에게 이용당하는 건강염려증 환자 아르강의 이야기.

 

실제로 병든 배우가 무대에서 상상의 병자를 연기한 이 역설은 몰리에르의 죽음을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농담으로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실제 삶이 연극 세계와 합쳐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1673년 2월 17일 공연 도중, 몰리에르는 기침과 출혈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그는 공연을 마치겠다고 고집했다.
alt&quot;상상의 환자&quot;
상상의 환자

 

관객들은 처음에 이것이 연기인 줄 알았다.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막이 내리고 집으로 실려간 몰리에르는 그날 밤 숨을 거뒀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성사를 받지 못했다. 사제 두 명이 배우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고, 세 번째 사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배우라는 직업은 여전히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파문된 신분이었다. 타르튀프에서 종교 위선자를 조롱했던 몰리에르는 결국 교회의 마지막 의식도 거부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과 죽음 전체가 타르튀프였다.

몰리에르의 유산 — 프랑스어가 곧 몰리에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가리켜 종종 '몰리에르의 언어(la langue de Molière)'라고 부른다. 셰익스피어가 영어의 표준이 됐듯, 몰리에르는 프랑스 문학 언어의 상징이 됐다. 그의 희극에서 쓰인 언어가 17세기 부르주아 파리의 살아있는 언어였고, 그 생생함이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극단이 다른 극단들과 합쳐져 설립한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는 1680년 루이 14세에 의해 공식 설립됐다. 오늘날까지 파리에서 운영 중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 극단이다. 몰리에르의 작품은 코메디 프랑세즈 레퍼토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alt&quot;몰리에르&quot;
몰리에르

 

몰리에르는 희극에서 이전의 모든 전통적 형식을 활용했지만, 정상과 비정상이 서로를 비추는 이중 시각에 기반한 새로운 스타일을 발명했다 —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의 대립, 지적인 것 곁에 있는 현학적인 것의 코미디.

 

이 이중 시각이 몰리에르 희극의 본질이었다. 타르튀프 옆에 오르공이 있어야 위선이 완성된다. 위선자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그 위선자를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고발한다. 그 이중성이 그의 희극을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라 인간 조건의 탐구로 만들었다.

참고 및 인용

1. Britannica, Molière — 생애, 작품 세계, 코메디발레 창안.

2. EBSCO Research Starters, Molière Writes Tartuffe — 타르튀프 금지 논쟁과 역사적 맥락.

3. University of St Andrews Research Portal, Controversy in French Drama: Molière's Tartuffe — 금지 전쟁의 정치적 의미.

4. Grokipedia, Molière — 코메디아 델라르테 영향과 신고전주의와의 관계.

5. Grokipedia, Tartuffe — 타르튀프 판본 변화와 드라마 구조 분석.

6. Fiveable, French Neoclassical Theatre: Molière, Racine, and Corneille — 삼통일 법칙과 세 거장의 스타일 비교.

7. Susannah Fullerton, 17 February 1673: Molière Dies — 몰리에르의 마지막 공연과 죽음.

8. Britannica, Western Theatre: French Neoclassicism — 17세기 프랑스 극장 환경과 루이 14세의 역할.

다음 편

드라마의 역사 016 — 18세기 계몽주의와 드라마의 민주화. 이성의 시대가 무대에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감상적 희극(sentimental comedy)의 탄생, 시민비극(bourgeois tragedy)의 등장, 그리고 볼테르에서 레싱까지 — 드라마가 귀족의 손을 떠나 시민의 것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드라마의 역사

고대 그리스의 제의에서 시작해 오늘날 OTT까지,
드라마라는 예술이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해왔는지를 깊이 있게 추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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