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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동백꽃 필 무렵-한국 드라마 변화의 변곡점이 될 여성 드라마

by 자이미 201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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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도 이번 주면 종영이다. 벌써부터 이제 뭘 보나 하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좋은 드라마였다. 재미와 의미를 놓치지 않은 드라마를 오래간만에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가 가지는 가치는 크다.

 

흔한 로맨틱 코미디나 스릴러 추리극까지 결합한 변종 장르였지만, 형식이 성공으로 이끌 수는 없는 일이다. 여러 복합 장르들이 뒤섞인 형태의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장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하지 않는 선에서 이를 잘 이용했다는 점에서 <동백꽃 필 무렵>은 현명했다. 

이 드라마는 동백의 성장기가 핵심이다. 지독한 외로움을 품고 살아왔던 동백이 옹산으로 와서 정착하며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명은 까불이고 다른 이는 용식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인물은 극과 극에 위치해 있지만 둘 모두 동백의 성장에 혁혁한 공헌을 한다. 

 

여성을 상대로 살인을 하는 까불이는 동백의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동백이 옹산으로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동백에게 옹산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종렬이 잠시 살았던 곳이라는 점에서 그는 동백이 자신을 잊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전에 동백은 옹산에 있었다.

 

가정폭력을 이기지 못한 정숙은 어린 동백이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찾은 국밥집이 바로 덕순이 집이었다. 당시 용식이는 아직 덕순의 배에 있었다. 그 첫 만남은 결국 빨간 실처럼 인연이 되어 다시 그들을 연결시켰다. 동백에게 옹산은 그런 점에서 고향이다. 

 

용식은 서울에서 찾지 못한 인연을 옹산 고향으로 내려와 찾았다. 보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레이스라는 사실을 깨달은 용식은 무식해서 용감했다. 그렇게 시작된 용식의 우직한 사랑은 결국 동백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나갔다. 주눅 든 삶을 살았던 동백은 진정한 사랑을 받으며 조금씩 세상에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리고 이제는 가족이라 생각했던 향미가 사망하며 동백은 완전히 변하기 시작했다. 까불이를 피해다니고 도망치려 했던 동백은 오히려 까불이를 잡기 위해 나섰으니 말이다. 그 변화는 결과적으로 동백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놨다.

 

까불이를 피해 종렬에게 맡긴 아들 필구를 데려오는 이유가 되었다. 여기에 종렬의 찌질함을 더는 참지 못하고 코에 한 방을 날린 동백의 이 행동은 그의 성장을 극적으로 보여준 대목이다. 과거의 사랑이자 한때는 유일하고 전부였던 남자에게서 완전히 떠나 오롯이 독립된 존재로서 동백을 의미하니 말이다. 

옹산에는 마치 전설의 아마조네스처럼 여성들이 지배하는 곳이다. 게장거리 여성들은 주체적인 존재들이다. 남성들은 그저 힘없이 보조적인 입장에서 아내를 돕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군수가 되겠다며 큰 꿈을 키우는 규태에게도 아내 자영에게는 철없는 아들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회적 지위가 문화도 바꾼다. 변호사인 자영은 집에서도 언제나 우위를 점한다. 결혼도 자신이 원해서 규태를 선택했다. 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이혼 역시 원해서 했다. 이 과정이 익숙한 것은 기존 남성들이 해왔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제시카 모녀의 삶도 그런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자영과는 정반대에 있던 향미는 혼자인 어머니 밑에서 컸다. 술집을 하는 어머니로 인해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향미는 어린 남동생을 홀로 챙겼다. 커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남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다했다. 하지만 가족에게 버림받고 찾은 것은 동백이었다. 

 

남자가 아닌 동백을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 향미의 삶 역시 우리 시대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지막 지점에서 그럴듯한 남성이 아닌 치유의 힘을 가진 동백을 선택한 것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취잡이라는 비난까지 듣는 상황에서 이 선택은 진화된 변화의 한 흐름이니 말이다.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그래서 반갑다. 덕순과 정숙의 삶은 과거 여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용식이를 밴 상태에서 남편을 잃은 덕순은 혼자 아이들을 키워내야 했다. 억척스럽게 살 수밖에 없었던 덕순의 삶은 한순간도 평탄할 수 없었다.

 

여성을 버리고 엄마가 되어 세상과 맞서야 하는 삶이 녹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덕순의 성격을 용식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정숙의 삶도 팍팍하기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다. 정숙은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어떻게든 둘이 살아보려 발버둥을 쳐봤지만 어린 딸을 데리고 젊은 여자가 세상과 맞서 싸울수는 없었다. 어린 딸이라도 살리기 위해 보육원에 버리고 돌아서야 했던 엄마 정숙이 어떤 심정인지는 극 중 동백과 잠자리에서 나눈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지독한 모정으로 동백에게 뭐라도 하나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온 정숙의 삶 또한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기도 했다. 지독한 가난과 무지할 정도의 문화 속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혹은 할머니들의 삶을 덕순과 정숙은 살아냈다. 

 

극을 이끌어가는 모든 주체는 여성들이다. 남성들은 보조적인 입장에서 참여할 뿐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이런 변화를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냈다. 이런 변화들은 결과적으로 남녀가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어울리며 살아갈 세상을 위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드라마가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변화를 위한 공감을 조성할 수는 있다.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은 그런 가능성을 가장 합리적이고 유쾌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동백이도 가고 옹산 사람들과도 곧 이별해야 하겠지만, 이 드라마의 가치는 후속 드라마들이 더욱 고착화할 수도 있어 보인다. 변화는 그렇게 우리 곁에 가깝게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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