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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cast 방송이야기/Broadcast 방송

스트레이트-전두환과 은폐된 죽음, 세월호 참사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by 자이미 2018.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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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5월 광주의 피를 짓밟고 세워진 정부라는 사실을 이제는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광주 시민들을 희생양 삼아 도륙했던 자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1년 만에 3당 합당의 결과물로 풀려났던 전두환. 그의 만행은 광주만은 아니었다. 


보수는 없고 독재자 보위만 있었다;

팔당호 탱크 수몰 사건과 제주 C123 수송기 추락 사건, 인면수심 짐승들의 민낯



자국민을 희생양 삼아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은 민간인 학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군인들까지 단순한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두환 시절 국민들은 그저 소모품일 뿐이었다.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두 개의 사건을 통해 전두환이 어떤 존재였는지 보다 세밀하게 파고 들었다. 전두환의 악행이 그저 광주민주화항쟁 희생자에 국한되지 않는단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이 내세운 가치는 보수다. 그리고 그 보수에게 중요한 존재 중 하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들이다. 


방송에서 다룬 두 사건은 모두 군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박정희에 이어 총과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무소불위의 힘을 누렸다. 전두환 자체가 법인 시절에 그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국민을 학살해 공포 정치를 하던 시절 모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1985년 수천 명이 지켜보던 자리에서 탱크 한 대가 팔당호에 빠졌다. '85 필승 훈련'에 참가하 20사31전차부대 소속 탱크가 이동 중 팔당호에 빠졌다. 이 사고로 인해 4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훈련 중 사고를 당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인재였다.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탱크 한 대가 팔당호에 빠졌다. 그럼 훈련을 멈추고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전두환이 지켜보는 훈련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 전두환이 앉아서 보던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문제의 탱크가 빠졌다. 


전두환 역시 이 광경을 목격했다. 사고가 나는 장면을 보면서 전두환은 병사들을 구하라는 명령을 하는 대신 화를 냈다고 한다. 훈련이 좋았는데 다 망쳤다며 불쾌감을 보였다고 한다. 서슬퍼런 군부 독재 시절 모든 권력을 가진 전두환이 짜증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팔당호에 빠진 군인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사고가 난 후 군에서 이를 처리하는 과정도 끔찍하다. 훈련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말만 한 채 '순직 처리돼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 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라' 그들의 고압적인 자세에 유가족은 다시 울 수밖에 없었다. 군인이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세상에 군인들의 죽음을 이렇게 다루는 자들이 스스로 보수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그래서 황당하다.


당시 시범훈련 참관 특전사 소위였던 장원규는 '세월호 참사'가 있을 때 당시 생각이 났다고 밝혔다. 침몰하는 배를 지켜보기만 했던 박근혜 정권과 수몰하는 탱크를 수천 명이 바라보면서 아무도 구하지 않았던 전두환 정권은 닮았다. 비록 사고이지만 사건으로 만든 것은 그들의 인면수심 때문이었다. 


1982년 제주 공항 활주로 확장 공사 준공식에 전두환이 참석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최고라는 특전사 부대원들이 '봉황새 1호 작전'이라는 전두환 경호를 위해 수송기 다섯 대에 나눠 타고 제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C123 수송기가 한라산 바위에 충돌하며 탑승자 53명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기상악화로 인해 비행기가 뜨면 안 되는 날씨였지만 전두환을 위해 그들은 죽을 수도 있는 비행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사고가 난 후 국가가 사고 경위를 파악해 잘잘못을 따지고, 유가족들에게 사죄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전두환 시절 국가는 국민들은 그저 소모품일 뿐이었다. 


사고 직후 현장을 찍은 제주 기자는 모든 사진을 빼앗겼다. 당시 목격자인 한라산 청원경찰에게는 영원한 침묵을 요구한 것이 그들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희생자를 찾기 위해 도착한 가족들을 막아선 것은 군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고 현장을 통제했다. 


사고 수습을 위한 통제는 당연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은폐였다. 사고 현장 수습은 하지 않은 채 그들이 한 것은 공군 EOD(폭발물 처리반)가 출동해 3번에 걸쳐 폭파를 했다고 한다. 사고 수습이 아니라 은폐를 위해 수송기와 사망한 군인들을 다시 죽인 이 파렴치한 자들이 당시 지배 권력인 전두환 정권이었다. 


사고가 난지 100일이 지나 겨우 감시를 뚫고 현장에 도착한 가족들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수송기 파편과 함께 사체가 엉망으로 망가진 채 널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 속에는 유골이 가득했다고 한다. 제대로 된 사체 수습도 하지 않은 채 국가는 사망자들을 그렇게 다시 능욕했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특전사 대테러부대 350명이 제주로 향한 것은 전두환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 때문이었다. 사고 직후 국방부는 '봉황새 1호 작전'을 '대침투 작전'으로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두환 하나를 위해 최정예 특수부대를 제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었다. 


제대로 된 사고 수습은 하지 않은 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던 그들은 진정한 군인도 아니었다. 유가족들은 1989년 전두환과 박희도를 살인 혐의로 고소했지만 그들은 처벌 받지 않았다. 박희도는 승승장구했고, 전두환은 여전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전두환의 이런 모습을 우린 박근혜에게서 그대로 봤다. '세월호 참사'가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전두환과 박근혜의 대처 방식을 보면 명확해진다. 독재자 박정희 후배였던 전두환과 딸인 박근혜. 그들이 보고 배웠던 가치는 그런 것이었다. 국민들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저 자신들을 위한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바로 국민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 권력이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희생을 강요했다. 그건 보수가 아니다. 


보수라 자처하는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안위만 살피는 위정자들일 뿐이었다. 보수의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극우, 아닌 독재자들일 뿐인 그들에게 국민은 존재 가치조차 없었다. 이승만이 홀로 도망치며 한강대교를 폭파한 것이나,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킨 후 수많은 국민들을 간첩으로 몰아 통치 했던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자들을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전통적인 보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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