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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지붕 뚫고 하이킥 89회, 부의 되물림이 만드는 천민 계급주의

by 자이미 2010.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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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방송되었던 89회속 정음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려는 인물입니다. 졸업을 앞둔 그녀가 겪어야만 하는 설움이 절절하게 담겨져 같은 처지의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냈을 듯 합니다. 그녀가 서울대가 아니라 서운대이기에 겪어야 하는 사회적 설움. 과연 그녀만의 잘못일까요?

서울대는 가진자들을 위한 귀족대학?

과거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공부만 하면 서울대에 입학도 하고 이를 통해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가지게 되고, 이로 인해 집안 자체가 일어서는 경우들을 일컬어 많은 이들은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이 이젠 자신들의 전철을 밟으려는 수많은 개천을 복개하려고만 합니다. 용이 승천할 수도 없도록 원천적인 방어를 통해 부의 대물림을 넘어 권력의 대물림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척박함에서 일궈내는 인간승리 드라마가 점점 사라지는 이유도 그런 사회의 어긋난 구조때문입니다.

나눔은 사라지고 독식이 미덕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나만, 우리 가족만 가지면 행복하다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인해 사회는 더욱 피폐해지기만 합니다. 그런 사회적 악순환은 사회를 허약하게 만들고 그 허약함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그런 빛나는 성과에 샴페인을 터트렸지만 축복이 아닌 경제 성장의 뒤안길속 어둠만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고착화되어갈 뿐입니다. 경제성장을 무기로 권력은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그런 권력을 자신의 이익으로 취하는 그들과 다수 기업들의 야합이 만들어낸 재벌들은 대한민국에 새로운 귀족 사회를 열었습니다.

당당한 기업이 대한민국에는 있기라도 한걸까요? 권력에 야합하고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온갖 불법으로 거둬들인 부는 그들을 대기업이 아닌 재벌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서구사회의 합리적인 기업문화와는 달리 2~3%의 주식만을 가지고도 기업의 창업주나 상속자라면 그 기업을 지배할 수있는 우리만의 독특하며 전근대적인 기업 문화가 아닐 수없습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몇몇 재벌들에게 모든 권리를 부여하며 친재벌정책으로 일관해온 권력은 이제 권력도 잡아먹는, 나아가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는 '괴물 재벌들'을 만들어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재벌만을 위한 정책은 중소기업의 존립을 어렵게 하고 고용대란을 불러오는 폐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재벌들이 잘살면 고용이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국가적으로 유용할 것이라는 그들만의 논리는 더이상 고용없는 성장시대에, 이십대부터 사회적 낙오자로 살아가게 만드는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구조적인 희생을 강요받는 청춘들만 양산하는 죽어가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만들어놓은 재벌 기업에 들어가는 좁은 문 마저 대부분을 권력과 부의 대물림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귀족층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부와 권력은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강남 부자 자식들의 서울대 입학 비율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서울대 입학생 부모들도 소위 '사'자 아니면, 대기업 간부, 중소기업주등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과거처럼 열심히 공부만 해서 서울대 들어가 좋은 직장얻어 출세한다는 '꿈'은 꿈으로서만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재벌들에 의해 중소기업들은 존립이 힘들어지고 생존을 위해서는 스스로 종속되어야만 하는 이 사회에서 청년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친재벌 정권의 '올인원' 정책은 더욱 이런 천민자본주의를 고착화시키고 거짓된 합리화로만 이끌 뿐입니다.

부와 권력의 카르텔은 자신들만의 혈연 관계로 공고히 구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축된 재벌계급들은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으로 고착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남의 일일 뿐입니다. 더욱 많은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수족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에게 청춘들은 그저 일회용 건전지와 다름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쓰다 용도패기되어버리는 청춘들. 그들에게 꿈꿀 수있는 권리조차 박탈해가는 사회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낙오자의 허튼 넋두리 정도로 폄하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병패를 그저 몇몇 루저들의 볼맨 소리로만 치부한다면 더많은 낙오자들만 양산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추노>에 등장했던 양반 사냥꾼들과 그들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그저 과거속의 혹은 꾸며낸 이야기라고만 이야기할 수없는건, 그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너무 닮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울대를 가지 못하는 서운대생 정음은 그렇게 태어나 성장하면서부터 성공하는 자의 희열보다는 실패가 겹겹이 쌓이는 낙오자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저 정음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들을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허약한 인물로 폄하할 수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가진자들에 의해 싹쓸이 되는 사회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귀족의 일원이 된 그들은 최고의 유치원을 다니고 어린시절부터 최상의 교육만을 받으며 자라나 그들만의 대학을 통해 사회에 당당하게 입성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들의 히스토리는 새로운 부로 자리잡고 그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귀족이 되어갑니다.이런 타고난 불합리함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청춘에게 꿈은 사치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정말 늦었습니다. 그 너무 늦은 지금이라도 많은 이들이 함께 할 수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소수의 가진자와 그 가진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다수의 국민노예들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정음이 울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그런 상황속에서 가진 지훈에게 '자신과 같은 이들이 겪는 고통을 모르겠지만 쪽팔리고 속상해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가슴을 무겁게 만듭니다. 그렇게 다시 내가 잘 할 수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음의 다짐이 반갑게 느껴집니다. 이런 정음을 지켜보며 그녀를 응원하는 가진자 지훈의 마음을 우리 사회의 가진자들도 나눌 수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사회가 공평한 사회라고 생각하시나요? 부나 권력이 대물림되는 사회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있을까요? 과연 2010년 대한민국에서 '개천에서 용났다'가 유용한 말이 될 수있을까요? 가진자들부터의 변화가 없다면 변할 수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썩을 수밖에 없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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