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영화 평론가가 쓴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가 있다. 영화도 만들었으니 감독이기도 하다. 문화원 세대로 영화에 대한 가장 열정적인 시대를 살았던 그는 곧 삶이 영화이고, 영화가 삶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 속 영화는 이제 천만 영화 시대로 들어서며 몰락을 향해 가고 있다.
영화와 TV의 대결 구도;
다양성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목표로 향하는 영화, 예능에 종속되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많아졌다. 전국적으로 영화학과들이 개설되며 한 해에만 영화 전공자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단 1% 정도만이 영화로 밥을 먹는 일을 할 정도로 좁은 문이다.
어느 분야든 문은 좁다. 성공은 소수의 몫이고 모든 이들은 그 소수를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되는 경우가 일상이다. 물론 이런 시각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어져 조정되어질 뿐이다. 모든 가치를 줄 세워 순위를 정하고 등수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던 못난 권력이 만든 절망의 프레임을 그렇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종영이 되었지만 JTBC <전체관람가>는 제법 알려진 영화 감독들의 단편 영화 제작기를 다뤘다. 단편 영화 부흥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하지만 과연 그들의 주제처럼 정말 그럴까? 예능에 종속된 영화의 현실만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던 방송이었다.
예능으로 포장된 단편 영화 제작기가 단편 영화 부흥을 위한 길이 될 수는 없다. 구조적인 지원이 무너지고 문화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예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법전은 아니니 말이다. 사실 영화는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오랜 시간 문화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문화원 세대에서 시네마떼끄 시대로, 그리고 독립 영화가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지난 9년의 시간 동안 퇴보만 하던 문화는 그렇게 단절의 길을 갈 뿐이었다. 예술 영화라는 자체가 사어가 되어버렸고, 극장은 획일적인 돈벌이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천만 영화가 한 해 한두 편씩 등장하는 영화계는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국내에서 천만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지기 힘든 구조가 되었다는 의미다. 해외로 확장하고 그렇게 영화 터전 자체가 커지는 시장의 극대화라면 상관없지만, 작은 파이를 누군가 모두 차지하는 구조로 변질되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다.
정성일 평론가는 어쩌면 낭만주의 영화 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맴돌지도 못하는 메아리처럼 공허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의 탄생과 TV의 등장, 컬러 TV 시대 등 수많은 변화들을 겪으며 이제는 휴대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조만간 VR로 통합되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뇌 속에 모든 것이 담긴 무가 유로 존재하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예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예능에 한 번 나오는 것이 더 효과적일 정도로 예능의 대중적 가치는 높다.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닌 이젠 예능으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다. 이는 대중들이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화는 이제 사라져간다. 보다 말초적이고 감각적이며 웃기는 것 만을 원할 뿐이다.
1인 미디어 시대가 엄청난 부를 안고 일반화되고, 다매체 시대가 말 뿐이 아닌 일상이 된 시대. 고전적인 TV를 통해 시청의 시대는 지나고 휴대폰으로 소비하는 시대, 복잡하고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들은 시장에서 통하지 않게 되었다. 짧고 강렬하면서도 웃겨야 하는 그 요구에 맞는 것은 결국 예능이다.
뤼미에르 형제는 자신이 찍은 다양한 영상을 그랑 카페에서 공개적으로 상영하며 영화라는 매체는 세상에 알려지고 일상이 되었다. 에디슨도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이런 경쟁은 치열했다. 그리고 에디슨이 만든 것은 다수가 관람하는 형태의 영화가 아닌 소수를 위한 방영 형태인 '핍쇼'였다.
작은 구멍이 뚫린 곳에 야한 사진들이 이어지는 도구는 그렇게 에디슨에 의해 만들어졌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결국 현재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남들과 공유하기 힘든 은밀함은 그렇게 '핍쇼'라는 형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를 위협하던 TV. 이에 맞서기 위해 보다 커진 극장은 컬러 TV 공습에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힘은 영화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세상을 여전히 지배해갔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 거대한 극장의 역사는 모두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작은 휴대폰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전통적인 가치는 사라져가고 있다. 혹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과거에 얽매여 있을 이유 또한 없을 것이다. 외형적인 가치의 기준들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요구는 그렇게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 던 정성일 씨는 어떤 생각일까? 그는 여전히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정성일이니 말이다. 이제 세상은 예능이 될 것이라는 말이 더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시대는 이어지고 그 중심 기제는 언제나 변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지배 구조는 하부 구조가 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존재가 미약했던 그 무엇이 지배자가 되는 경우도 우린 목도하고 있다.
예능이라는 그 유연한 포식자는 그렇게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유쾌해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가면을 씌우는 가식의 힘이 되어버린다면 그것도 무서운 일일 것이다. 예능이 지배하는 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미 우린 예능에 살고, 예능에 의해 알게 모르게 지배 당하고 살아가고 있다. 대화와 소통의 대상이 예능이 주가 된 세상이니 말이다.
2018년에도 예능은 보다 강력한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영화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위기는 수없이 반복되어 올 수밖에 없는 숙명의 길은 더욱 고되게 이어질 가능성은 높다. 예능이 지배하는 시대. 우린 어떻게 이를 소비해야 할 것일까?
시네필의 시대는 지났다. 진지하게 영화를 바라보고 분석하던 시대도 저물었다. 천만이라는 거대한 허울 앞에 균일적인 영화가 무한 반복 생산되는 시대. 그렇게 영화는 예능에 잠식되었다. 예능의 거대한 힘은 그렇게 매체 모두를 집어 삼키고 있다. 그렇게 예능의 시대는 도래했고, 예능에 종속된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영화라는 기존 틀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를 담는 그릇과 풀어내는 도구가 달라질 뿐일 것이다. 그렇게 생명을 이어가는 영화가 다시 한 번 언젠가 세상이 영화가 되는 그 날을 기다리고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벼워진 세상 그 가벼움을 담는 그릇이 된 예능은 그렇게 우리의 삶이 되었다.
예능의 역기능보다 순기능처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기를. 그리고 그렇게 서로 유쾌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시대가 되기를 바란다. 지독한 어둠은 지나고 그렇게 새롭게 해는 떠올랐다. 2018년 모두가 행복한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날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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