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단 3회를 남긴 이 드라마는 여전히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합니다. 해피엔딩인지 아니면 열린 결말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황에서 이야기는 밀도를 쌓아 올라가고 있다는 점에서 반갑게 다가옵니다.
홍 회장이 은밀하게 만들어놓은 패닉룸은 존재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손잡이 끝을 열어 숨겨진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반대편 벽이 열리며 패닉룸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놨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홍 회장이 죽은 후에야 그 비밀의 방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있어야 할 현금 9천억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최근 뭔가를 꺼낸 흔적은 보이지만 누가 그걸 가져갔는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확신은 슬희나 은성이 빼돌렸을 가능성은 있지만 증거가 없는 상황입니다. 돈은 없지만 홍 회장 죽음으로 모슬희가 더는 회사를 장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모슬희가 현금 9천억에 만족할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홍 회장이 모아둔 비디오 테이프들을 보다 문제의 패닉룸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은성이 눈치챌 것이라 추측해 봤지만, 그보다는 슬희가 더욱 영악하고 잔혹했습니다.
은성의 역할은 해인에 대해 집착만 하는 단순한 존재로 전락되었습니다. 해인을 위해 슬희의 악랄한 공격을 막아서는 자도 은성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막는 자들은 모두 죽이는 슬희에게 해인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은성을 농락했던 토지 중개업자 편성욱이 사망한 채 발견되었는데, 그 짓도 은성이 아닌 슬희가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모두 치워내는 슬희의 이 행동은 결국 종결에 자승자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일한 피붙이인 은성 때문에 말이죠.
해인 가족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슬희가 꾸미고 있는 마지막 계략이 뭔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악행에 마침표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레이스 고에게 거액을 넣은 통장을 보여주고, 지급정지 시키고 부려먹는 모습을 보면 슬희의 악랄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홍 회장 장례가 끝나자마자 현우는 좋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독일 병원에서 해인을 치료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락이었습니다. 고강도 초음파를 이용해 넓게 퍼진 종양을 파괴할 수 있다며 최근 치료 성과도 좋았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수술은 가능하지만 문제는 해마 일부가 손상되어 지금까지의 기억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는 현우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해인은 생명을 연장하고 소중한 기억 모두를 잃게 된다는 리스크는 작가가 내놓은 진부하지만 신박한 전술입니다.
기존 기억이 모두 삭제된다는 것은 은성에게도 좋은 신호로 다가옵니다. 그건 자신에 대한 불신도 씻어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니 말입니다. 은성이 해인을 차지할 가능성이 기존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그가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현우로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대신 잃을 수도 있는 딜레마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당연하게 해인이 수술을 받기 원합니다. 자신을 사랑했던 모든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그가 살 수만 있다면 당연하다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마지막까지 이 사랑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도록 만드는 장치를 작가는 진부함을 끌어와 새롭게 변형시켰습니다.
해인이 수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쩔줄 몰라하는 장면도 세심하게 빌드업시켜 감정을 폭발하도록 만드는 과정도 너무 좋았습니다. 모두 앞에서 들었을 때는 쉽게 감정을 표출할 수 없었습니다. 혼자 방에서 이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해도 쉽지 않았죠.
현우를 찾아가 반복적으로 물어보는 과정에서 조바심보다 포기했던 희망을 되찾은 것에 대한 감사함이 해인의 표정과 억양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 해인이 현우 방에서 나와 넋 놓고 우는 과정은 이게 현실임을 깨달은 행복한 오열이었습니다.
결혼 후 신혼여행 이외에는 단둘이 여행을 가본적 없던 해인과 현우는 마치 신혼처럼 함께 행복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연인들의 일상 풋풋함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죠. 행복한 해인은 현우에게 말하지 못한 세 가지 비밀이 있다며 첫 비밀을 알려줬습니다.
문제의 MP3에 세겨진 이니셜 H가 바로 해인을 의미한다며 운동장에서 만났던 여자가 바로 자신이라 알려주죠. 얼마 전 해인의 물음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것이라며 하얀 거짓말을 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날 이후 이름을 알지 못해 모든 학급을 다니며 해인을 찾았다는 솔직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죠.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단단했습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게 묵힌 감정 역시 강력한 힘을 내기도 합니다.
생존 가능성이 급격하게 높아진 상황에서 용두리 마을 사람들이 봉숭아 물을 들이는 장면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방실이 현우가 자신을 좋아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말을 믿기보다는 봉숭아 물을 들이고 첫눈 올 때까지 잘 남기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해인의 첫사랑은 곧 현우니 말이죠. 그리고 이 봉숭아 물이 들린 새끼 손가락은 치료가 끝난 후 기억을 잃은 해인이 현우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치는 흥미로운 복선으로 다가오죠.
패닉룸에 있어야 할 비자금이 사라진 후 현우가 그냥 잊었을 거라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모슬희 일당이 가져갔다고 확신한 현우는 자신들이 당한 방식으로 되갚아주려 합니다. 비자금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들고, 그 자금을 모두 퀸즈가 흡수하도록 함정을 파놨고, 조급한 은성은 실제 그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인 가족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작들도 보였습니다. 수철은 홀로서기를 다짐했습니다. 다혜를 위해 용두리에 남기로 결정했죠. 그렇다고 시골에서 살기 위함이 아니라, 부모의 지원이 아닌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노력을 선언했습니다.
해인 역시 집이 아닌 현우 오피스텔로 가기로 합니다. 독일로 가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현우와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죠. 범준은 해인과 논의 끝에 용두리 시내에 사둔 빌딩을 두관 가족에게 넘기기로 결정합니다.
갑자기 빌딩을 가진 상황이 되자 현태와 미선이 나서기 시작하지만, 봉애의 단호함은 난장판을 사전에 예방합니다. 주식과 코인 투자로 큰 손해를 본 현태로 인해 이혼 선언한 아내 역시 빌딩에 관심을 가지는 상황들은 그저 당연한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신혼 생활을 오피스텔에서 하고 싶었다는 현우의 의지는 뒤늦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피할 수도 없는 그들은 진짜 신혼 생활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해인의 비밀도 공개되었습니다.
해인이 항상 언급하던 첫 사랑첫사랑 '버스남'에 대한 진실은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위한 사전 연습을 위해 눈까지 뿌리는 현장에서 공개되었습니다. 눈을 볼 수 있을까 우려하던 해인을 위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현우의 이 배려는 자연스럽게 첫사랑의 주인공도 드러났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하던 현우가 해인의 첫 사랑이 자신이란 사실을 알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 역시 이들이 찐사랑 중임을 알 수 있게 했습니다. 372번 버스 뒷자리에 앉아 퇴근하던 현우를 매일 따라가며 바라봤던 해인은 "앞으로"라는 단어가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다는 말도 하죠.
우리에게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미래를 언급하는 이 단어가 죽음을 앞둔 이에게는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오늘이 마지막인 이들에게 "앞으로"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의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독일로 향하며 해인은 현우에게 마지막 비밀도 알려줍니다. 너구리 영숙이는 자신이 꾸며낸 거짓말이라 토로했죠. 그것도 모르고 항상 그곳에 가면 영숙이를 외쳐 부르던 현우는 해인의 거짓말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싫지도 않았습니다. 그것마저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도착한 현우는 해인에게 자신도 비밀이 있다며 수술을 하게 되면 기억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왜 현우는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요? 마지막까지 숨겼다면 수술을 쉽게 받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은성도 해인의 수술을 반기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도 작동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해인에게 마지막까지 숨기고 싶은 것 없게 하려는 배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인이 살기 바라는 현우의 마음이니 말이죠. 실제 "너는 살아, 사는거야, 제발 살자"라며 해인을 붙잡는 현우의 의지는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해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죠. 기분 좋게 수술받으러 왔는데 바로 앞에서 이런 핵폭탄급 발언을 하게 되면 쉽게 수술에 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던지 기억을 잃던지 둘 중 하나를 하라는 통보처럼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작위적으로 남은 회차에서 이들의 갈등을 이용한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처럼 다가온다는 것은 아쉽게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을 통해 해인이 살고, 잃은 기억들을 조금씩 되찾는 과정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현우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감동으로 이끌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 '편지'에서 박신양이 자신이 죽어가며 남겨질 아내를 위해 몰래 영상 편지를 찍는 장면을 패러디 한 현우의 이 모습도 나쁘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잠든 사이 옆에서 자신이 누군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애절하게 이야기하는 현우의 모습은 뭉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께"라는 다짐이 현실이 될지 기대됩니다.
범자와 영송의 사랑이 영글지 못한 모호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진솔함이 묵직함으로 다가옵니다. 우직하게 다혜만 사랑하는 수철의 사랑이 바보 같지만, 사랑이란 언제나 눈도 귀도 멀게 한다는 점에서 박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첫눈과 봉숭아 물, 그리고 영상 편지와 기억에서 사라져 있던 어린 시절 바다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빨간 옷을 입은 아이의 기억들은 해인이 다시 기억을 되찾는 장치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3회만 남긴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합니다. 열린 결말일지 꽉 막힌 해피엔딩일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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