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교과서에도 실려있던 의병들의 사진이 이렇게 활용될지는 몰랐다. 역사의 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김은숙 작가의 서사는 점점 성장 중이다. 기존의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이름 없는 민초들인 의병들이 중심이 된 <미스터 션샤인>은 새로운 역사를 작성했다.
애신이 꿈꾸는 조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사람들, 그렇게 역사는 만들어져 왔다
사랑이라는 가치 없이 오직 대의 명분 만을 앞세운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인간이란 더욱 복잡 미묘한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전쟁이 난 시점 가장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 본능에 가까운 사랑일지도 모를 일이다.
대상이 사람이 아닌 사랑도 존재한다. 막연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24번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졌다. 암울한 시대 그 누구의 요구도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요구가 아닌 자발적으로 나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누군가 알아주기 바라는 죽음이 아니었다.
그동안 우린 수많은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에만 심취해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열사와 의사 등의 이야기 역시 값진 교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열사와 의사들이 존재한다. 기록되지 못한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병들의 이야기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시작과 끝은 의병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방인의 눈을 통해 조선의 현실을 바라보는 형식도 흥미로웠다. 서부극 형식 속에서 기존 방식과 달리, 외부인은 내부인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자신을 희생해 수많은 이들을 살린 그 역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의병 중 하나였다.
'총, 영광, 슬픈 결말'은 <미스터 션샤인>의 모든 것이었다. 애신이 처음 배웠던 영어 단어들은 그의 삶이 되었다. 종의 아들로 태어나 지독한 상처만 입은 채 천신만고 끝에 미국으로 넘어가 군인이 된 유진 초이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만 받던 아이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험한 말만 쏟아낸 채 일본으로 건너가 낭인이 되었다. 그렇게 한 무리의 대장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구동매는 여전히 애신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애신의 정혼자였지만 자신의 할아버지를 증오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김희성도 돌아왔다.
각자 다른 이유로 조선을 떠나 있던 그들이 돌아오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앞선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 저격수로 나서 현장에서 마주친 운명들은 애신의 삶을 뒤흔들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병으로 살아갔던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아 스스로 의병의 삶을 선택한 조선 최고 명문가의 애기씨의 삶은 그렇게 처절했다.
역적들의 사진을 찍는 희성은 그게 최선이었다. 자신이 다른 동무들처럼 총이나 칼을 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유진이 선물한 카메라로 열심히 역사를 기록한 희성은 몰래 호외를 찍어 사람들에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일깨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름 없는 신문사를 운영하던 그였지만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출세를 위해서는 나라를 버린 자들에게 희성은 좋은 먹잇감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모진 고초를 감당해야만 하는 그의 삶도 의병이었다. 비록 사랑하는 이들처럼 일제에 맞서지 못한 그에게 기록은 중요한 의미였다.
동매에게 그날은 인생 마지막 보름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보름 날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렇게 동매가 기다린 이는 바로 애신이었다. 자신에게 빚진 애신은 매달 보름 동전 하나씩을 갚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동전을 받던 날 동매는 자신의 삶이 이제 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낭인들이 다시 들어오고 그들과 맞서 싸우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으로 오직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해왔던 수많은 낭인들을 모두 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사망한 동매는 말에 묶인 채 전시하듯 끌려가는 신세였다.
행랑아범과 함안댁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의병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그들. 그리고 그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애신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들이 죽음을 선택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핏덩이었던 애신과 처음 만나 키워낸 함안댁. 그 모든 시간이 자신에게는 너무 값진 것이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애신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변신한 채 오열하는 그가 애기씨라는 사실을 안 저잣거리 사람들은 몰려오는 일본군에 맨몸으로 맞섰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죽음을 목도했던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애신을 구하기 위해 모두 나섰다. 고 대감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줬다.
의병들을 도왔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 고 대감을 존경하는 그들에게 애기씨를 구하는 것은 곧 그 은혜를 갚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군에 억울하게 죽은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했다. 직접 의병이 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순간 그들 모두가 의병이었다.
맨 몸으로 서로의 팔을 끼워 단단하게 인간 방패를 만든 사람들. 그런 그들의 모습에 기가 꺾인 일본군. 그들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애신을 구해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용기를 만들어낸다.
애신은 과거 의병 활동을 하던 여인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 "어느 날엔가 저 여인이 내가 될 수 있다"는 말로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른 이들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애신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렇게 그들은 힘없는 조국을 두려움 속에서도 지켜내려 했다.
모두가 의병일 수는 없다. 의병으로 자처한 이들 중에도 밀정은 존재한다. 의병을 잡는다는 방을 보고 엄청난 현상금에 스스로 친일을 하고자 나서는 자들도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서도 당당한 역적들은 그렇게 후손들까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이 땅에서 다시 일제 시대와 같은 삶이 도래한다면 청산하지 못한 과거로 인해 다시 한 번 나라를 파는 자들이 판을 칠 것이다. 나라를 팔아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대한민국이니 말이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그렇게 미래마저 어둡게 만들 뿐이다.
의병 활동의 거점을 만주로 옮기기로 결정한 그들은 그게 새로운 시작이거나 마지막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태극기를 가지고 의병을 찾은 유진도 그들과 함께 만주로 향하기로 했다. 유진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애신도 행복했다. 그 과정에서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한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다면 두려울 일도 없으니 말이다.
의병들의 만주 행은 영원한 비밀로 남겨질 수 없었다. 그렇게 기차에 탄 애신 일행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후발대인 황은산과 다른 의병들 역시 위기에 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조건 기차를 출발 시켜야 하는 애신은 유진이 타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차를 출발 시켰다. 유진이라면 어떻게든 올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후발대는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을 구하다 더 큰 일본군과 마주해야만 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 죽음이 기다리는 이 싸움에서도 그들은 당당했다. 비록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일본군과 맞서 순직한 그들은 의병이었다.
애신을 찾기 위한 일본군의 압박은 점점 심해졌고, 위기에 처한 애신을 구한 것은 다시 한 번 유진이었다. 단 한 발 밖에 없는 총을 가지고 일본 대작을 앞세워 일본군을 위협하는 유진은 그렇게 애신과 이별을 고했다. "당신은 나아가시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신은 바로 알게 되었다.
터널을 기점으로 유진은 일본군들을 마지막 칸으로 몰아넣은 후 한 발 남은 총으로 칸을 분리 시켰다. 그건 자신의 죽음으로 애신을 구하겠다는 의미였다. 애신 만이 아니라 많은 의병들이 탄 열차 속에서 스스로 일본군의 먹잇감이 된 채 남겨진 유진. 그런 유진의 희생을 목 놓아 흐느끼는 애신. 그들의 손에는 결혼 반지가 있었다.
비록 남들처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해보지도 못했지만 그들은 부부였다. 유진은 애신과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버텼다. 그리고 그의 가방 속에는 두 사람이 행복한 얼굴로 찍은 사진이 있었다. 유진의 가방을 보관했던 수미는 그 사진을 보고 오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 두 사람이 가지는 가치는 특별했으니 말이다.
유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이는 수미만이 아니었다. 수미의 동생인 도미 역시 유진은 아버지이고 형이기도 했던 은인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유진. 카일 무어의 도움으로 외국인 묘지에 안장된 유진의 묘지를 찾은 성장한 도미는 그렇게 의병이 되어있었다.
수미도 만주로 건너가 애신이 이끄는 의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수많은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국을 되찾기 위해 먼 이국 땅에서 고된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총탄 자국과 수많은 의병들의 수결 자국이 선명한 그 태극기는 그렇게 만주에서도 흩날렸다.
<미스터 션샤인>은 세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완성했다. 마지막 회 시작과 함께 희성은 정미칠적의 사진을 찍었다. 역사에 길이 남겨져야만 하는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들의 사진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하지만 서럽게도 그 사진 속 후손들은 여전히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게 다가올 뿐이다.
영국인 종군기자에 의해 찍힌 사진은 유일한 의병 사진이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 사진을 그대로 재현한 모습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제각각인 의복과 나이 대의 한무리가 총을 든 모습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역사에 사진 한 장 만을 남긴 의병. 그리고 그 사진으로 남겨지지도 못한 수많은 의병들의 후손들은 현재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알려진 독립 투사 후손들의 삶이 피폐하다는 사실은 우린 알고 있다. 나라가 독립된 후에도 독립 투사들을 위한 배려보다는 친일파들을 등용했던 역사의 죄인들.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정치 권력의 한 축에 남겨져 있다는 것이 우리의 아픔이다.
애신의 부모가 사진 한 장을 남겼듯, 유진과 애신 역시 그 사진관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 사진이 그렇게 그들의 마지막 추억이 될 것이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마저 내던진 그들이지만 사랑 역시 중요했다. 사랑을 위해 조국을 버릴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사랑은 가장 큰 힘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 그 위대한 힘이 없다면 인간은 조금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위대한 이름이기도 한 사랑. 그 사랑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운명 역시 달라진다. 24번의 이야기 속에 가득했던 그 사랑. 나라를 위한 혹은 그 누군가를 위한 그 사랑이 역사를 만들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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