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이상의 노동자가 사는 나라. 그럼에도 노동자만 홀대 받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송곳>이 가지는 위상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통상적인 범주의 웹툰 한계를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안내상이 연기하는 구고신은 그런 잔인한 현대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민주화된 지 고작 30년인 대한민국;
이수인과 구고신 인간적 고뇌, 우리 현대사는 친일과 독재에 맞서 싸운 국민들 투쟁의 역사다
사회적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나서는 이들은 대단하다. 그리고 존경스럽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홀로 투쟁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라고 두려움이 없을까? 그 두려움마저 이겨내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그들에게 권력은 사람이기를 부정하고는 한다.
푸르미 마트에 급격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노조 결성에 맞서 전면에 나서 싸우던 정 부장은 연이은 실패로 인사상무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며 옆에 앉히기에 여념이 없던 상무가 어느 날부터 정 부장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저 멀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시하고 외면하는 상황까지 이르고 있다.
인사상무는 노조 파괴를 위해 인사이동을 감행한다. 푸르미 마트에서 가장 악랄한 존재인 고 과장을 일동점으로 보내며 사측의 압박은 정점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필요 없다. 조직의 융화나 기업의 성장도 무의미하다. 상무에게 고 과장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유형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일동점에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이들이 싸우며 금이 가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그리워질 정도로 고 과장은 철저하게 노동자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건들며 분위기를 극단적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전출된 허 과장의 자리에 온 고 과장은 문제가 있었던 황준철 주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오직 한 명만 잡고 괴롭히면 된다는 그의 논리는 성과를 얻기 시작한다.
인간이기에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부추기는 고 과장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시하고 개인의 인성마저 파괴하려는 고 과장으로 인해 황 주임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평생 친구인 주강민 주임과 비교를 하며 자신의 가족사까지 들먹이고 예비부인과의 관계마저 흔들려는 고 과장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와 같았다.
고 과장이 일동점에 들어서며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일들도 심해졌다. 황 주임과 주 주임의 관계를 흔들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노조에 참여하지 않았던 안내부스의 노동자들까지 불안을 증폭시키며 노조 가입을 독려하는 상황도 모두 인사 상무와 고 과장의 작품이다.
인포 직원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언뜻 보면 당연하고 반겨야 할 일이지만 이는 노조를 흔들기 위한 하나의 묘수일 뿐이었다. 마트 안에서 가장 최상의 자리라고 이야기되는 인포는 모두가 가고 싶은 곳이다. 매장 상품 진열과 판매를 하는 노동자와 캐셔, 그리고 인포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자리 변화 과정의 최상위 층에는 인포가 있다. 그런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나름 열심히 살았던 그들은 그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다른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며 월급까지 반토막 나는 상황에서도 인포는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자리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측이 흘린 하나의 이야기에 그들은 불안해졌다. 인포도 순환근무를 하도록 하겠다는 확정되지도 않은 유언비어는 그들이 노조에 가입하는 이유가 된다.
방관자로 외면하던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급하게 노조 가입을 하고 기존의 노조원들과 마찰이 빚어지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동안 사측이 오히려 노조를 위한 조직이 되었지만, 인사 상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노조 내부의 분열을 야기해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푸르미 마트 일동점 노조 설립에 혁혁한 공헌을 했고 현재도 가장 든든한 디딤돌이 되고 있는 이수인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왔던 삶과 다름에 충돌하고 바로잡기 위해 시작했던 노조. 하지만 수시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그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있는 아빠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수많은 혼란 속에서 정상적으로 노조 활동을 하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월급은 반토막나고 승승장구 할 수도 있었던 삶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존재로 전락했다. 현재 투쟁 중이기는 하지만 노노갈등을 부추기는 사측으로 인해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 자신을 믿고 함께 해준 노동자들을 힘들게만 한다는 자책도 그를 더 힘겹게 한다.
구고신이라고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아니 그에게 행복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그 날 이후 사라진 단어인지도 모른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는 잔인한 고문의 희생자다. 현재는 배에 구멍이 뚫린 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처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일을 하고 있다.
이수인을 만나며 다시 한 번 힘을 얻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에 등장한 낯선 남자에 당황한다. 경비원으로 새롭게 들어온 자가 바로 고신의 인생을 완전히 무너트린 고문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그 지독한 공포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당시 받았던 고문의 후유증은 그저 몸만 망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붕괴시켰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끝내 그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료를 팔아야 했던 고신은 그렇게 친구의 삶도 망칠 수밖에 없었다. 고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평생 지독한 책임감으로 힘겨워할 수밖에 없었던 고신에게 고문 가해자의 등장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렸던 고신은 집요하고 잔인한 고문을 버티기 힘들었다. 항상 웃으며 마치 친구나 삼촌처럼 대하던 그 고문 기술자는 그래서 잔인했다. 인간의 나약한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친해지면 고문이 약해지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무모해 보이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할 일이 끝나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한 그의 잔인한 고문은 언제나 이어졌다. 스스로 꼬리가 있었다면 꼬리를 강하게 흔들었을 것이라는 말처럼 그는 그 지독한 공포 앞에서 항복 선언을 했었다.
평생을 살면서 결코 꺼내보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짐짓 태연한 척 그자가 아닌 국가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건 그저 고신이 버틸 수 있는 방식일 뿐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잃은 친구.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를 팔아야 했던 고신은 그래서 항상 아팠다. 그런 친구가 헤어지며 "고신아. 우린 그때 어렸었어"라는 말 한 마디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어렸던 그 시절 살기 위해 동료를 팔아야 했던 고신. 그런 죄책감이 그를 노동 운동에 헌신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분노를 속으로 삭인 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잔인한 공포의 기억은 그를 괴물로 변화시키려고 했다.
고문 기술자의 아들과 손자 앞에서 자연스럽게 꿈틀거리던 고신의 분노는 수인으로 인해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그 잔인한 유혹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고신 역시 인간이니 말이다. 환경 미화원들의 야유회에서 주민 신고를 받고 왔다며 당장 멈추라는 경찰의 멱살을 잡고 호통을 치던 고신.
알코올중독에 빠진 노동자에게 오히려 책임감을 주며 그의 자존감을 높여주던 고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군 시절 만났던 대대장이 전부인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인생 패배자라는 인식 속에 부당함마저 당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 전부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멀어질수록 권위를 사랑해"
수인에게 건넨 고신의 발언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낮은 자존감은 결국 자신이 얻지 못한 권위를 동경하게 될 수밖에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야유회를 막기 위해 온 경찰에게 강경하게 대처하는 고신에게 왜 경찰의 인권을 무시 하냐는 수인의 대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가 주는 용역비가 200만원인데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은 100만원이 전부다. 세차를 하는 시설은 있어도 노동자들이 씻을 샤워장 하나가 없어 버스도 타지 못하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시청의 9급 공무원이 하늘과 같은 존재다. 그런 그들이 단합 야유회에 나선 것은 자신의 인생을 건 도박과 같은 모험이었다. 그런 그들 앞에 경찰 하나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고신의 행동은 당연했다.
단순하게 푸르미 마트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송곳>이지만 그 안에 우리의 현대사가 잘 담겨져 있다. 단순한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이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크고 강렬하며 잔인하게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드라마 <송곳>에는 정치꾼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부조리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 정치꾼들이지만 그들에게 그런 일은 요원하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금배지가 중요할 뿐이지만 정치꾼들에게 사회적 부조리를 바로잡는 일은 뒷전일 뿐이다. 국민을 대신해 그 자리에 올라선 그들은 철저하게 국민들과 별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투쟁의 역사다. 일제와 싸워야 했고, 독재자의 잔인한 폭압정치에 맞서야 했다. 그렇게 국민들은 자신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세웠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인 독재 시대가 끝난 게 30년도 채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민주주의가 이명박근혜 시대가 되어 다시 과거 박정희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상황은 그래서 끔찍하게 다가온다.
구고신 역을 한 안내상의 그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인 연기는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가 살아온 삶이 그리고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삶 자체가 바로 우리의 현대사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앞세워 국민들을 희생시켜왔던 그들과 맞서야 했던 국민들의 관계가 구고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고 있으니 말이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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