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이념 갈등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숨져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왜 자신이 그렇게 잔인하게 학살되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국군과 경찰, 미군과 동네 극우 청년들에 의해 사망했다. 그 사망자의 대부분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인류 범죄다.
끝나지 않은 전쟁 민간인 학살;
퇴보한 권력 양승태 대법원장이 만든 가이드 라인 학살 희생자 두 번 죽인 국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북한산 근처에서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우이동에서 발견된 유해들은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해골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 우이동 토박이들은 알고 있었다.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공사들이 매일 벌어지는 서울에서는 알 수 없는 유해들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유해들을 제대로 수습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없는 상태에서 현장 노동자들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이동에서 다량의 유해들이 발견된 것도 공사중 우연하게 현장 노동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해는 발견되었지만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이동 토박이는 주 선생이라고 주장했다. 음악을 가르쳤던 주 선생과 가족들의 유해라는 주장이다. 두 할아버지의 공통적인 주장은 있었지만 해당 초등학교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1950년으로 추측되는 그 시기만 학교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 선생 가족과 민간인으로 추정되는 유해는 서울 수복 후 나온 보복 과정의 학살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군이 서울을 3개월 동안 지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그들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서울 수복 후 이제는 다른 쪽에서 북한에 동조한 이들을 찾아내 학살을 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서울에서 처음 발견된 유해들이 어린 아이와 노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군에 동조했던 이들도 있고 그에 대한 보복이 있을 수는 있다. 당시 전쟁 상황이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고 해도 어린 아이들까지 학살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울 수복 후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 되었다는 증언들과 기록들은 존재하지만 유해가 발견된 것은 우이동이 처음이었다. 이는 천만 인구가 사는 서울 어딘가에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이들이 묻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이동 유해 발견은 그저 말로만 떠돌던 민간인 학살이 실제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산시 배방읍 폐금광에서 발견된 유해는 충격적이었다. 유해 발굴 40여일 만에 200여 구가 발견되었다. 구덩이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유해들을 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졌는지 추측하게 한다. 구덩이를 파고 사살하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다시 사살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배방읍 유해 현장에서 발굴된 것은 단순히 뼈조각들이 아니었다. 90여개의 비녀, 그리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았던 푸른 구술과 장난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민간인 학살 장소에서 사망한 이들이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유품들이다.
이 학살을 주도한 이들이 동네 치안대였다는 점도 충격적이다. 서로 잘 알고 살아왔던 이웃들이 하루 아침에 잔인한 학살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저 알지도 못한 채 밥을 달라는 북한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던 이들까지,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은 이유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경찰이 지시하고 지역 청년단이 학살의 가담한 금정굴 학살 현장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태극단 소속의 생존자는 이무영 경찰 서장 가족이 전쟁으로 학살 당하자 보복을 했다는 주장이다. 북한군이 학살하고 돌아간 후 남겨진 이들에게 가해진 학살은 잔인했다.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자신의 가족들이 학살 당했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그 수백 명에 달하는 민간인 중 이무영 당시 고양 경찰 서장 가족을 살해한 이가 있고, 가담자가 있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으로 복수를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경북 문경 석달 마을에서는 국군들이 민간인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진규 소위가 이끈 국군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한 후 기록에는 이들이 모두 공비라고 기록한 사건이다. 실제 이런 사건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제주 4.3 사건은 짧은 시간 안에 이승만 정권과 미군에 의해 제주도민 수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여전히 제주 4.3 사건의 정확한 명칭도 정해지지 못할 정도다. 올 해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에도 봄이 온다는 말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의미를 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군 시기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최대한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 당시 국가 배상 재판이 이뤄지고 많은 이들에게 국가 배상금이 확정 판결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명박 집권 시 양승태가 대법원장이 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확정 판결된 국가 배상금을 다시 빼앗고, 이자까지 더해서 받아내는 국가. 행정부가 걱정해야 할 예산 문제를 법원이 우려를 표하며 국가 배상금 지급을 거부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억울하게 숨져야 했던 수많은 이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일이었다.
배상금을 제대로 주면 국가가 망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앞세워 피해자 유가족을 괴롭히는 국가는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법관 블랙리스트 등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수많은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철저하게 권력을 위해 충성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국가 배상의 기준을 확립해 철저하게 희생자 가족들을 괴롭히는데 국가 권력을 악용했다.
한반도 영구 평화를 위한 종전 선언이 올 해 안에 체결될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이들은 고통 속에 방치되어 있다. 잔인하게 학살된 가족들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지난 세월. 빨갱이 가족이라는 말로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숨겨야 했던 공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승만의 빨갱이 프레임은 이명박근혜 시절까지 이어졌다. 아니 현재까지도 극우 세력들의 기본 논리만 종북좌파, 빨갱이가 전부다. 그들에게 유일한 전략은 '빨갱이' 하나 뿐이다.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념 갈등을 부추기며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를 양산했던 지난 시절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에 대해 국가가 최선을 다해 배상을 해주는 것 역시 당연하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 권력의 폭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정부는 그대로다. 정부마저 제대로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는 전쟁의 상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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