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준 보았느냐 세종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말이다
위기에 처한 소이와 광평대군을 구한 한짓골 똘복이의 등장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소이의 부탁을 듣고 나타난 채윤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분노가 가시지 않은 채윤은 광평대군을 볼모로 삼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글자를 위해 자식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백성들에게는 쓸모도 없는 글자를 만든다고 하지만 과연 그게 백성을 위한 것이냐는 채윤의 반문에 광평대군은 왕을 우습게보지 말라며 위대한 대업을 위해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버릴 왕이 아니라는 말에 채윤은 내기를 걸게 됩니다. 과연 아들의 목숨을 걸고 글자를 만들 수 있을지 아니면 글자를 포기할지 말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채윤의 오기가 만든 도박은 시작됩니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이번에는 왕이 아들을 잃는 아픔으로 직접 느껴보라는 채윤의 광기는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트라우마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넘어서지 않는 한 죽는 순간까지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채윤과 세종의 악연은 결코 해소될 수 없기에 광평대군을 볼모로 한 그의 도박은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채윤이 광평대군과 소이를 구출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방을 붙여 세종을 압박한 밀본은 사실을 알게 된 후 혼란스러워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이 내붙인 방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히려 조롱꺼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당황하는 밀본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광평대군이 주제소에서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은 그들이 채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닌 밀본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고만 생각한 채 고뇌에 빠질 수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글자 포기와 아들의 목숨을 거래하자는 압박에 왕 세종이 아닌 아버지 세종으로서 번뇌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흔들리는 인간 세종의 모습은 그가 왜 진정한 성군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모두를 내보내고 홀로 오열을 하면서 백성들을 위해 만든 글자를 포기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다짐한 세종은 스스로 자수한 윤평을 찾아갑니다. 강하게 그를 압박하던 세종은 윤평 앞에서 흐느끼며 아들 광평을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모든 것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세종의 모습을 보며 웃는 윤평의 모습은 그러나 급변하는 세종의 모습에 경악하게 됩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느냐?"라며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며 그 어떤 압박에도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윤평에게 선왕인 태종처럼 광기어린 분노를 보이던 세종은 내면 속의 아버지 세종의 모습을 보이다 진정한 세종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이 아닌 스스로 깨닫게 만들겠다며 삼단 변신하는 이 과정은 한석규의 연기가 얼마나 탁월한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밀본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그런 폭력이 아닌 진정 백성을 위하는 왕이 어떤 모습인지를 결과로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그런 세종의 믿음은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자가 있기에 가능한 신념이었습니다.
광평대군이 똘복이에 의해 구해졌지만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밀본은 추리를 통해 똘복이가 세종을 암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그들의 추론과 추리에는 피상적인 모습에 대한 판단은 있었지만 진정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식으로 변하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똘복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세종과 그가 어떤 고통을 함께 하고 있는지를 정기준은 상상도 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종은 똘복이가 광평은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공포 속에서 경연장에 나서 단호한 말로 경고를 보냅니다. 만백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글자를 만드는 일에 미친 듯이 반기를 들며 왕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향해 세종이 내뱉은 말은 모든 이들을 통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말이던가요? 어쩌면 많은 이들이 최근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만의 글자를 가지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자는 것이냐는 성균관 학자들과 대신들의 주장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철저하게 중국이 아버지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종속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종속주의자들은 그저 중국의 속국이 되어 자신들의 안위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백성들이나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철저하게 자신들의 권리만을 내세우며 세종을 압박하는 밀본의 모습만 봐도 그들의 가치가 얼마나 우스운지는 쉽게 알 수 있지요. 문화 종속주의에 빠져 한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들에게는 무척 소중한 도구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한자는 자신들이 권력의 중추가 되고 이를 통해 무수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백성들과 완벽하게 차이를 가질 수 있는 도구가 되니 말입니다.
권력이 권력을 낳는다는 이 평범하지만 지독한 원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채윤이 분노하듯 광평대군에게 퍼붓던 이야기의 핵심은 양반들은 글자만 익히면 되니 쉽겠지만 백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글자를 익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수만 자의 글자를 익혀 권력을 가지는 양반들과 달리, 글자를 익히고 싶어도 사회 구조적인 모순으로 글자를 익힐 수 없는 백성들은 구조적으로 강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구조적 모순은 2011년 대한민국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학부라는 서울대 입학생 비율이 갈수록 강남 출신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치 과거 조선시대의 모습처럼 양반과 일반 백성으로 나뉘어 점점 고착화되는 사회는 현정권 들어 더욱 가속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진 자들만을 배불리게 하는 정책은 빈부 격차를 극단적으로 만들었고 이런 빈부의 격차는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미래를 망치는 결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그들에게 미래의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있게 다가올까요? 가진 자들에게만 이롭게 만들어진 사회적 모순들은 철저하게 99%를 버린 채 1%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통해 스스로 귀족을 자처하며 권력과 부를 되물림 하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대한민국이 조선 초기 세종 시절보다 못한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세종 같은 성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정치를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양반에게만 집중된 권력을 파괴하기 위해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위대한 한글을 창제했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글자를 몰라 억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이 더 이상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만 자의 글자. 그 중 천자를 익히는데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똘복이가 자신이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세종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28자만 익히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한글의 위대함을 체험하고 나서였습니다. 세종이 만들고자 했던 한글이 무엇이고 왜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게 된 똘복이는 비로소 스스로 한글을 익히고 나서 세종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익힌 한글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적어 세종에게 건네며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해달라는 똘복이의 모습은 감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대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에만 집착하는 사대부들과 달리, 백성들이 모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을 만들어낸 세종의 가치는 그저 똘복이만 느끼는 감동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거 중국이 패권을 쥐고 있었다면 현재는 미국이 패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패권이 조금씩 무너지며 권력이 이동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한국의 권력자들은 미국 종속주의에 빠진 채 패권국가에 아부하고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며 자신들의 안위만을 따지는 모습에서 과거의 사대부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 뿐입니다.
오직 몇몇 재벌들과 권력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한미 FTA를 통과시킨 그들은 한나라당의 날치기를 도운 민주당까지 한 패가 되어 99%의 서민들을 절벽 밑으로 내던지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위한 정책이고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는 이미 명확합니다.
우리사회에 가장 절실한 것은 세종과 같은 성군입니다. 그런 성군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입니다. 세종대왕이 경연장에서 신하들 앞에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밀본 원들에게 정기준에게 전하라며 과거 정기준 자신을 억압하던 폭력에 맞서 "겨우 폭력이라니"라는 말로 세종을 조롱하던 말을 다시 건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마 그 말을 건넨 정기준은 잘 알고 있겠지요.
아이유의 3단 변신을 능가하는 한석규의 3단 변신 연기는 연기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보는 이들을 흥분하게 하는 그 감동의 연기는 우리 시대 가장 절실한 성군을 더욱 그립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SBS 드라마 방송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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