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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cast 방송이야기/Documentary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1~2부-처음으로 다룬 천재 김민기의 삶, 감동 그 이상이다

by 자이미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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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노래들이지만 그 원곡자가 김민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스스로 언론을 차단하고 '학전'에서 수많은 이들을 무대에 세우며 대중에게서 멀어진 탓도 있을 겁니다.

 

3부작으로 만들어진 김민기 특집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새삼스럽게 알게 해 줍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겼던 그의 삶은 투사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음악사에 가장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도 있었던 김민기의 삶은 시대가 그를 다른 길로 걷도록 만들었습니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신화이자 전설이고, 위대한 예술가인 김민기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1부는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한 배우들의 '학전'이야기를 2부는 학전 무대에서 섰던 다양한 가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가수 김민기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서울대 미대에 다니던 김민기는 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과정은 흥미로웠습니다.

 

이 다큐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언론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던 김민기로 인해 주변인들 100여 명을 인터뷰해 얻은 결과라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를 알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학전' 출신 배우는 대중문화 전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물들입니다. 그들이 학전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을 만든 이가 김민기이기 때문이었죠. 김민기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던 당시, 그가 만든 극단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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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유명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만은 아닙니다. 그가 쌓아온 그 모든 삶의 흔적들이 그들에게 모두 그곳을 향하게 만드는 이유였습니다. 뮤지컬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신인들을 김민기는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하게 했죠.

 

국내보다 유럽에서 더욱 유명한 나윤선이 주인공으로 나선 이 뮤지컬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많은 스타들이 풋풋한 모습으로 등장했죠. 노래도 잘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은 상황에서 김민기는 기본부터 가르쳤고, 그렇게 올려진 뮤지컬은 이내 입소문이 나며 긴 줄이 늘어서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배우들을 트레이닝시켜서 역사적인 뮤지컬을 만들어냈고,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200m가 넘게 긴 줄이 늘어설 정도로 큰 인기를 얻은 '지하철 1호선'은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으며 해외 공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1회 스틸컷

1994년 처음 시작된 '지하철 1호선'은 2023년 12월 31일 공식적으로 4237회 공연을 마무리했습니다. 30년 동안 초장기 공연을 한 '지하철 1호선'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남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공연의 역사보다 더 학전이 대단한 것은 착취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연기를 하고 싶어 대학로를 찾은 수많은 이들은 많은 극단에서 6개월 10만 원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착취를 받으며 연기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연극판에 '학전'은 처음으로 연기자들에게 계약서를 작성해줬습니다. 6개월 10만 원 주는 것도 대단한 호의라고 보이는 듯한 태도를 보인 시절 계약서를 받아본 배우들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죠. 개런티 계약에 굶지 말라고 식권까지 발급했습니다.

 

배 곪고 힘겨운 연극배우의 삶이 '학전'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학전' 연출부는 직원으로 분류되어 4대 보험까지 가능해져, 전세대출이 가능하다는 은행의 연락을 받아봤다 합니다. 처음으로 전세 계약을 하고 아내와 행복해 울었다는 이야기는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신용불량자로 살아가는 배고픈 연극배우에게 직업인 배우로서 위치를 잡아준 이가 바로 김민기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문화가 당연시되던 역극판에 김민기는 당연한 권리를 배우들에게 줬습니다. 그리고 투명한 회계로 배우들과 수입과 지출, 그리고 월급까지 공개한 곳이 바로 '학전'입니다. 오직 관객들의 수입으로만 배우들은 살아야 한다는 김민기의 소신은 역설적으로 위기를 맞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연극이 가지는 매력이 존재하지만 직접 연극을 보러가는 인구가 적은 현실 속에서 배우들의 월급 주는 것도 벅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배우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자신의 집을 담보 잡아 대출까지 받으면서도 대기업 후원도 거부했던 김민기의 원칙은 비록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지만 배우들에게 자신의 직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했습니다.

서울대 미대생 김민기와 학전 대표 김민기

배우라는 직업은 결국 관객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관객에 의해 살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을 이 만큼 제대로 보여준 이는 없을 듯합니다. 자신의 집까지 담보 잡아 운영하던 김민기는 배우들에게 "잘 되면 얼른 나가. 뒤돌아 보지 말고"라고 배우로서 가능성이 높은 이들을 내보내는 것을 당연시 했습니다.

 

배울 학과 밭 전 자로 만들어진 '학전'은 김민기 스스로도 '못자리'라고 언급했습니다. 농사가 끝나면 새로운 못자리를 만들듯, 그렇게 수많은 배우들을 키워내는데만 집중한 이가 김민기였습니다. 김민기는 "계산이 안 맞지"라는 말에 운영 자체가 말이 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면서도 김민기 대표는 학전을 이끌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말에 김민기의 사명감은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경기고 서울대 라인은 대한민국의 핵심 권력을 이루는 정재계 인사들이 나온 곳입니다. 후배의 증언처럼 김민기라면 큰돈이나 성공을 하고 싶었다면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말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삶을 모두 희생해 '학전'에 모든 것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학전'은 배우들만의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들국화를 시작으로 박학기, 장필순, 강산애 그리고 YB만이 아니라 라이브의 신이라고 불렸던 김광석도 '학전'에서 공연을 했던 인물들입니다. 그들에게 '학전'은 특별한 공간이라 그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고인이 되어 더는 무대에서 볼 수 없던 김광석이 '학전'을 찾아 김민지가 제작한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노래를 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노래를 찾지 못하던 김광석에게 김민기는 "세상에 노래는 많다. 맞는 걸 찾아 부르면 그게 네 노래다"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웠다고 합니다.

 

전인권이 불렀던 '이등병의 편지'를 김광석이 부르며 전설은 시작되었습니다. 김민기 대표가 언급했듯, 김광석은 자신에게 맞는 노래를 찾으며, 천 회 공연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역사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김광석 공연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 역시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2회 스틸컷

조윤선이 평가한 김민기의 노래는 '늙지 않은 음악'이라 했습니다. 1971년 자작곡으로 만든 최초의 앨봄인 '김민기 1집'을 보면 조윤선의 평가가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전설이 되어버린 '아침 이슬'만이 아니라,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등과 친구인 한대수가 선물한 '바람과 나'까지 첫 앨범은 그 자체가 레전드가 되었습니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며 음악인 김민기의 삶은 힘겨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체포되기도 하고, 그의 앨범 전체가 판매 금지되며 무대에 설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유신에 반대하는 이들은 거리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불렀고, 그게 무도한 권력자들에게는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투사로 입대한 김민기는 유신 정권이 앨범을 문제 삼아 강제로 전방으로 보내 군생활을 하기도 했죠. 다큐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고향인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런 삶보다 김민기 제대 후 인천의 피혁 공장에서 일한 에피소드가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노래 만들고 부르는 김민기의 삶의 변화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이 선택은 좋았습니다. 실제 김민기가 근무하던 그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입으로 그를 바라보는 방식도 특별했습니다. 지독한 노동환경에서 1급 발암물질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일을 해야만 했던 그들에게 김민기는 점심시간만 되면 기타 치고 노래를 불러줬다고 합니다.

 

옆 공장에서도 노래를 들으러 올 정도였다고 하죠. 그리고 살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 온 노동자를 위해 새벽부터 그들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하죠. "꿈은 얻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라는 김민기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노동자의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해저드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을 배경으로 흐르던 노래 '상록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드러났죠. 그 노래는 노동자들의 결혼을 축하 가기 위한 축가였습니다.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김민기가 직접 만들어 불러준 노래가 바로 '상록수'였죠.

기생충과 오징어게임 음악 담당했던 정재일
김민기 상록수는 노동자들을 위한 결혼 축가다

전남대 3학년 생인 박기순의 죽음에도 이 노래는 불려졌습니다. 들불야학을 하며 직접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힘든 노동을 마치고, 약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막차로 돌아간 후 연탄가스가 새는지도 모르고 12월 26일 사망했습니다.

 

학우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마지막 장송곡을 아무런 반주도 없이 나지막하게 '상록수'를 부르며 울던 김민기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의 눈물은 뭉클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미술가에서 가수로, 그리고 노동 현장에서 학전이라는 곳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본 불합리함에 김민기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분위기상 의문사를 몇 번이라도 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이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진행했습니다. 서울대 후배들에게 참여를 부탁했고, 체포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김민기는 너희들 이름은 나오지도 않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송창식은 녹음이 가능한 자신의 연습실을 선뜻 내줬다고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김민기처럼, 이를 도와줬다는 것만으로도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음에도 송창식은 그의 녹음을 도왔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카세트테이프는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져 노동 현장으로 배포되었죠.

 

신민당 당사에 모여있던 YH무역 여성 노동자 탄압은 당시 사회를 뒤집어놨습니다. 언제 터져도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잔인한 탄압이 세상에 알려지며,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독재자 박정희는 사살당했습니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여성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노래극으로 만든 김민기의 노래는 국민들을 들불같이 타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김민기 숙명이 되어버린 인생

직접 나서 운동권으로 활동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힘이 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자국민 학살까지 자행한 이 독재자는 '국풍81'을 만들어 김민기에게 무대에 서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의 일환이 되었던 '국풍81'를 거부한 김민기가 등장한 곳은 뜻밖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지막 3화에서 자세히 소개될 예정입니다. 고향에서 독재자가 아닌 민중을 위해 무대에 선 전설의 모습이 과연 어떻게 공개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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