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잊었던 혹은 알지 못하며 흘려보냈던 수많은 가치들을 누군가는 만들고 이끌어왔습니다. 그리고 김민기는 현대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가치를 남긴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지보다 세상이 그를 원했고, 그런 요구에 지독한 고통을 감수하기도 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린이극을 하고 싶었던 김민기는 학전을 세운 후에야 겨우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김민기는 어린이극의 기준과 가치를 세상에 알렸고, 꾸준하게 아이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열어줬습니다.
학전이 문을 닫는 것을 계기로 SBS는 김민기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그동안 김민기의 삶을 정리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새삼스럽게 다가올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이었죠. 야만과 격동의 시대를 관통한 김민기의 삶을 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아침이슬'은 그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가치와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을 시작으로 전두환이란 짐승의 시대를 관통하며, 군부정치의 끝을 알리는 거대한 흐름 속에도 그의 노래 '아침이슬'은 울려 퍼졌습니다.
1부가 '지하철 1호선'을 중심으로 한 학전에 대한 이야기였고, 2부가 가수 김민기의 삶을 들여다봤다면 3부는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과거와 현재 진행형의 김민기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우면서도 울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며 김민기는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사라진 김민기로 인해 일각에서는 그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죠. 권력의 눈밖에 나면 가차 없이 제거되던 시절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던 김민기는 제거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징역살이를 하고 재배치되어 전방에서 군생활을 마친 김민기는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 현장의 문제를 담은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그대로 대변한 이 노래극은 은밀하게 만들어지고 배포되어 노동자들의 애환을 달래주기도 했습니다.
모진 고통을 겪은 김민기는 직접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극도로 꺼릴 정도였다고 하죠. 하지만 그런 김민기가 무대에 오른 일도 있었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어른들이 일하는 동안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지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후배들이 함께 했고, 그들이 방송에 나와 소회를 밝히는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 야학을 통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 어렵게 대학까지 간 이의 사연도 뭉클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그들은 해냈습니다.
김민기는 야학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민기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찰과 정보기관에서 수시로 나와 감시하는 상태가 되니, 야학을 운영하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김민기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등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골로 내려가 홀로 농사를 짓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김민기는 절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꺾을 수밖에 없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싶은데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기 때문이죠.
야학을 하며 노동자의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민기는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공공육아 목적의 최초의 어린이집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직접 기획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아침이슬' 김민기가 무대에 선다는 소식에 티켓 3천 장이 바로 팔렸다고 하죠.
김민기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이들로 인해 당시 강남 아파트 가격보다 더 많은 3백만 원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산꼭대기에 '해송어린이집'이 만들어져, 오전 50명과 오후 50명이 그곳에서 놀고먹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민기는 자신이 직접 기른 쌀들을 '해송어린이집'에 보내주었다고 하죠. 이후 학전에서 어린이극을 연출할 당시에도 그곳 아이들을 무료로 매번 초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민기가 어떤 인물인지 이 사례만 봐도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야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는 김민기는 그곳에 온 어린 노동자들에게 손을 그려보라 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공장 노동자가 되어 엉망이 되고 퉁퉁 부은 손을 꺼내보이기도 힘들었던 그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손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준 김민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인 김제에서 농사를 짓다 경기 연천군으로 옮겨갔다는(물론 방송에서는 연천군 미산면만 나왔지만) 김민기는 서툰 농사꾼이었지만 그 소박한 삶이 좋았다고 합니다. 아무 걱정 없이 노동의 땀의 가치와 함께 어울려 사는 그 삶 자체가 행복이었다고 하죠.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주민들은 방마다 책이 가득했던 김민기의 집과 그의 농촌 생활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농사가 서툴기는 했지만, 열심히 했던 농사꾼 김민기를 말이죠. 아이들 체육대회가 열리면 김민기는 직접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동네 결혼식에도 참석한 김민기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오지만, 그만큼 농촌에서 삶에 만족해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겁니다. 그렇다고 그저 촌부로만 살아가지는 않았죠. 중간 도매업자들의 농간으로 살값 파동이 일어나자, 직접 나서 농부와 소비자를 연결시켜 모두가 이득이 되는 판매 방식을 제안해 만족시켰다고 하죠.
농민들은 평소보다 비싼 가격에 쌀을 팔 수 있었고, 소비자들은 더 싼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하니 모두가 만족할 수밖에 없는 판매 방식이죠.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겁니다. 그 소박하지만 정직한 삶에 만족했던 김민기였지만, 그곳에도 수시로 정보기관에서 찾아왔다고 하죠.
동향을 파악하는 감시받는 삶은 김민기에게는 지독함으로 다가왔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원인 모를 불이나 모든 것을 태워버린 후 김민기는 농촌의 삶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그 모진 삶 속에서도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1987년 거대한 물결 속에서도 김민기의 노래는 울려 퍼졌습니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사에 이어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국민들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노제는 처음에는 연세대 학우들에 의해 작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거리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하며 단숨에 백만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며 민주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출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시민혁명의 깃발 속에 백만 시민들이 함께 목청 높여 끊임없이 부른 노래가 바로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습니다.
더 특별했던 것은 그 현장에 김민기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누가 유도하거나 요청해서 부른 것도 아닌, 자연스럽게 울려 퍼진 노래를 듣던 김민기는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자신이 만든 노래지만 그 순간 더는 자신의 노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듯합니다.
예술 작품은 누군가 소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그렇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노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더욱 특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농촌에서 청년회를 조직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던 김민기가 공개적으로 마지막 무대에 선 것은 1990년이었습니다.
농촌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만들고 초대 사무국장까지 역임했던 김민기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한 사업이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군사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겨레의 노래'가 제작되고, 음반 발매 기념으로 순회공연이 열렸는데 그 공연에서 김민기는 직접 무대에 올란 통기타를 치며 '아침이슬'을 대중 앞에서 열창했습니다. 나지막하지만 호소력 깊은 김민기의 목소리는 청중들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골의 삶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온 김민기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들이었습니다. 어린이 뮤지컬을 준비했지만, 김민기가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산되었다고 하죠.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민중가요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이 음반도 김민기가 제작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힘들게 낼 수밖에 없는 음반이기도 했죠.
김민기는 이후 '학전'을 만들어 선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수많은 배우들이 성장할 수 있는 근간을 만들었습니다. 돈벌이가 아닌 오직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삶이었습니다. 1부에서도 나왔지만, 김민기가 돈 벌려고 생각만 했다면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뒀을 겁니다.
경기고 서울대라는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학벌은 당시만 해도 그 라인만으로도 뭘 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주는 돈만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그 원칙은 김민기에게도 힘겨운 일이었을 듯합니다.
연극이나 뮤지컬만이 아니라 다양한 공연 무대의 장이 되기도 했던 '학전'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가 처음 시작된 것은 방송사가 아닌 바로 학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된 이 프로그램은 그대로 방송이 되었죠.
이후 '이소라의 프러포즈'나 '윤도현의 러브레터' 등 엄청나게 성공한 음악 프로그램의 시조 역시 김민기의 '학전'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다시 놀라게 만들기도 합니다. 김민기의 선배였던 유홍준에게 요청해 '학전'에서 시작한 한국 미술사 강연 역시 대박이 나며 이제는 익숙한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김민기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대목은 '지하철 1호선'의 엄청난 성공에도 그는 유사한 작품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돈맛을 본 뮤지컬이지만, 김민기는 그것에 안주하거나 유사 뮤지컬을 통해 돈만 벌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돈이 되지 않는 아동극에 전념했습니다.
우리 미래는 결국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는 신념은 스스로 다시 힘겨운 길로 걷는 이유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위한 김민기의 아동극은 이후 우후죽순 등장한 아동극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학전 사람들조차 김민기가 왜 굳이 성공한 사례가 있음에도 아동극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죠. 학전의 음악감독이기도 한 정재일조차 왜 아동극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동극 음악을 만들어보라는 말에 김민기의 요구이니 어쩔 수 없이 했지만, 재미를 느껴 이후 학전 아동극 음악을 담당하기도 하죠.
아이들 눈높이에서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김민기는 당시 전국 초등학교 교과서를 모두 사서 탐독했다고 합니다. 교과서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알기 위해 수많은 책들을 읽고 이를 아동극에 녹여냈으니, 당연히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아동극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공연과 달리, 아동극이 열리는 날에는 김민기가 항상 무대 뒤에서 지켜봤다고 합니다. 공연을 하는 배우들이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너무 좋아서 항상 공연장을 찾았다는 김민기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아동극에 집중했습니다.
윤이상, 백남준에 이어 국내 세 번째 '괴테 메달' 수상자이기도 한 김민기.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후 김민기 역시 후보자로 거론되어야 한다는 주장들도 일었습니다. 밥 딜런의 수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게 김민기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현재 암 투병 중이지만 이겨낼 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후배들과 친구들이 원하듯 병마에서 떨쳐 일어나 다시 무대 뒤에서 수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뒷것으로 돌아와주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3부작으로 제작된 SBS 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노래와 야학, 그리고 학전과 아동극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 영원한 스승이자, 살아있는 영웅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활동이 기록으로 남겨져 10년, 혹은 20년 후 다시 뒷것 김민기의 삶을 반추하는 기록들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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