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혁은 과거 은희가 자신에게 했던 절교 선언을 돌려주었다. 아무리 참고 버티려 해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어디까지 추락한 존재로 인식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닐 것이란 생각에 자신에게 되묻는 행위 정도는 필요한 사안이었다.
찬혁은 용기를 내려했다. 은주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자꾸 선을 긋는 은희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진심을 다시 찾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고백하려 했다. 하지만 자꾸 어긋나는 감정선들은 여전히 그들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은희는 찬혁과는 영원한 친구여야 한다고 최면을 거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과거 찬혁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고백하는 은희의 감정은 널뛰듯한다. 분명 찬혁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은희의 모습은 찬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만 한다.
은희가 당황하고 찬혁을 의도적으로 멀리한 이유는 서영의 말 때문이었다. 찬혁과 은희가 주고받은 대화를 몰래 들여다 본 서영은 마침 찬혁의 회사에 온 은희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름 찬혁을 위한다는 생각에 한 말들이지만, 동의도 얻지 않고 찬혁의 메시지를 몰래 훔쳐보고 내뱉은 말은 화를 부르고 말았다.
자신과 나눈 은밀한 대화까지 서영에게 모두 말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은희는 찬혁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오해라도 바로 풀릴 수 있었겠지만, 찬혁을 위한답시고 피하는 은희의 모습은 아빠를 그대로 빼닮았다.
상식은 자신이 얼마나 우매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아내 진숙이 은주 친아빠를 만나고 있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진숙은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은주 결혼식에 낯선 남자와 웃으며 인사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딸 결혼식에 얼굴을 붉히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 그 남자 아내가 진숙의 대학교를 묻는 바람에 당황한 상태였다. 이를 수습하려는 남자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상식은 지례짐작으로 은주 친부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자신과 달리,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진 남자의 전형인 그가 바로 은주 친부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숙에게 직접 물어보지도 않은 채 상식은 확신하고, 괴롭히기에 정신이 없었다. 바보 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당일 풀어낼 수 있는 오해를 그렇게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진숙은 답답하기만 했다. 이야기를 했다면 오해하지 않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식은 자신이 왜 그랬는지 답답했다.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후배의 말이 가슴 깊숙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이 형님을 잘못 키웠어"라는 말은 상식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아내 진숙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 말이다. 숨기지만 않았다면 모든 것은 이렇게 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식이 사건도 은주 결혼식 상황도 자신이 꿍하고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은주는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다. 동생들에게 냉정하게 관계를 이야기하고, 남편에게는 둘 사이의 재산 관계까지 모두 정리했다. 시어머니와는 정면충돌을 피하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은주로서는 그렇게라도 스스로 독해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힘들다.
진숙은 여전히 상식을 사랑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알 길이 없다. 답답한 사람이지만 착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바보처럼 가족만 생각하고 힘든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그 답답할 정도로 착한 마음이 결국 모든 것을 꼬이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은희는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흔드는 역할을 한다. 중간인 은희는 평생 그런 역할을 하며 가족의 균형을 잡아왔었다. 컨테이너에서 영식 부자와 생활하는 아빠를 찾아간 은희는 궁금했다. 왜 당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잡혀갈까 두려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굶고 아내 진숙은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고 한다. 나무꾼이 귀하게 얻은 선녀 옷이 드러나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상식을 지배했었다.
상식이 조금 이상하다. 갑작스럽게 어지러워 쓰러지고 사물이 겹쳐 보이는 복시가 시작되었다. 그저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이 현상은 위험하다. 뇌졸중이나 그와 유사한 병이 의심되는 증세들이니 말이다.
진숙을 만나고 싶은 상식은 '데이트하기 좋은 곳'을 검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22살 그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함께 30년 넘게 살면서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자신이 왜 죽으려 했는지 알고 싶으면 나오라며 어렵게 찾은 다방에서 둘은 만났다.
레트로 열풍으로 만들어진 그곳에 진숙과 상식만 나이든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상식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던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다. 자신은 평생 짝사랑만 하는 인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진숙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짝사랑만 하는 것 같은 생각에 극단적 선택을 고민했다고 했다. 진숙에게는 '겨우 그만한 일'이었지만, 상식에게는 '겨우'가 '전부'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착각으로 아내는 과거 남친을 생각하고 있고, 아이들은 이제 자신이 필요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상식은 삶의 의욕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상식을 바로 잡은 것은 은주의 전화 한 통이었다. 졸혼 이야기가 나온 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큰딸의 전화는 극단적 선택을 50%는 줄이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산을 올라가는 길에 진숙이 좋아하는 구절초를 보면서 그 모든 마음을 접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모은 수면제를 모두 산에 묻고 내려오려 했다고 했다. 상식에게 가족은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가족을 잃는단 것은 상식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큰딸을 만나러 갔다. 은주의 연락이 아니라, 상식이 화해를 하기 위해 연락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태형은 이혼을 앞두고 불편했던 은주 가족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게 되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불편하고 힘겨웠던 태형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혼으로 모든 관계를 끊을 수 있게 되어 기쁜 것은 아니었다. 태형이 뒤늦게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숨긴 과거로 인해 실망했다고 생각한 상식은 딸 은주를 위해 선물을 사서 집을 방문했다. 그렇게 화해하고 싶은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했다. 은주에게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하지만 이미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한 은주가 어떤 말을 할지는 너무 자명하다.
은희를 너무 사랑했던 찬혁은 그렇게 그와 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은희가 보인 행동에 크게 실망했다. 많은 남자를 만나고 모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찬혁은 한 번도 분노하지 않았다. 정말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찬혁이 은희에게 고백을 하려는 마음이 굳어진 상태에서는 달라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서영이 자신이 은희와 나눈 문자를 몰래 본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봤던 친동생 같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은희가 갑자기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연락도 피하는 이유가 찬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서영에게 둘이 나눈 대화를 몰래 언급하며 히히덕 거리는 존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닥을 보인 은희의 모습에 찬혁은 참을 수 없었다. "오늘부로 너랑 끝이야. 너 아웃이야"를 외치고 돌아서는 찬혁.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찬혁의 무서운 표정에 은희도 놀랐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했던 말을 그대로 하는 찬혁의 냉정함이 두렵기까지 했다.
위태로운 상식은 진숙과 뒤늦은 데이트를 준비한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병은 그들을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차갑게 얼어붙은 찬혁의 마음을 확인한 은희는 불안하다. 독한 행동으로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에 급급한 은주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직 이들 가족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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