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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육룡이 나르샤 3회-이방원의 분노 선과 악이 아닌 정의는 왜 특별한가?

by 자이미 201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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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중 하나가 아니라 정의를 선택한 이방원. 악까지 품는 선이 아닌 악을 응징하는 정의를 강조한 이방원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공감을 표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선으로 품은 악은 어느 순간 선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직접 경험한 현대사이기도 하다. 

 

세 번째 용 이방원의 정의론;

철혈군주 이방원을 만들어낸 변절의 화신 홍인방, 여말선초의 신화는 시작되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아버지 이성계가 악랄한 이인겸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이방원은 분노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최고였다. 전장에서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탁월한 존재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같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무너지는 순간 이방원은 혼란스러웠다. 선은 악에 대항해 싸우고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던 이방원은 자신의 신념이 깨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아버지에 대한 신념이 사라진 후 이방원의 방황을 잡아준 것은 바로 정도전이었다.

 

전쟁을 막는다고 호언장담하는 정도전을 풀어주고 원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이인겸에게 거대한 엿을 먹이는 정도전의 기개에 이방원은 반한다. 물론 이런 정도전의 모습에 이방원만이 아닌 후에 이방지가 되는 땅새 역시도 동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 정도전의 이 기개에 반한 두 남자가 향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는 그래서 흥미롭기만 하다.

 

정도전을 스승이라 생각한 방원은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균관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함주로 돌아가는 이성계를 따르지 않고 개경에 남은 이방원은 오직 하나의 목표만 존재할 뿐이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향이 바뀌면서 더는 이방원에게 아버지 이성계는 특별한 존재로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생의 목표가 생긴 이방원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성균관에 들어서는 순간 잡혀간 홍인방이 남긴 인仁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 방원을 다시 한 번 들뜨게 만들었다. 인은 씨앗이 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홍인방의 말을 마음에 심고 공부에 열중한 방원은 함주 사투리를 쓰던 촌놈은 더는 아니었다. 나무를 심고 이인겸을 꺾는 그 순간까지 힘을 길러 복수를 하겠다는 어린 방원의 모습은 대단함으로 다가왔다. 

 

 

고려 말 혼란을 지배하는 이인겸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역으로 이용해 사대부들을 제압해 나간다. 그런 힘을 준 것은 다름 아닌 최영이었다. 고려를 지키는 것이 모든 가치의 전부인 그는 사대부에 의해 나라가 흔들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최영은 다시 한 번 이인겸에게 힘을 부여했고, 최영의 이런 단호함을 등에 업고 정도전을 유배 보내고 사대부들을 잡아들이며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정도전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사라진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유배가는 그에게 접근해 어머니를 아는지 묻는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어머니는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에 처해 있을 뿐이었다. 선왕이 가장 사랑했던 노국공주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던 연양이 바로 분이와 땅새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18년 전에 죽은 그녀가 어떻게 이 두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 의아한 정도전과 죽었다는 어머니가 자신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땅새와 분이 남매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고려 최고의 무술을 가지고 있다는 길태미의 탐욕은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탐욕의 끝은 결국 잔인한 죽음을 앞세운 피바람으로 이어질 수밖에는 없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길을 택한 길태미의 최후는 당연한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 길태미의 아들 길유는 국법으로 금지한 공부를 몰래하는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탐내는 허조의 아들이 그 무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길유는 이씨 삼형제를 행동대장으로 앞세워 유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맹자의 책을 태우라는 강압에 버티던 동수는 이씨 삼형제에게 이마에 '사문난적'이라는 세긴 후 더는 살 이유를 차지 못한 그는 스스로 자결을 선택했다. 동수가 남긴 유서마저 가로 챈 길유의 악행은 끝이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결심을 하게 된다.

 

동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이런 협박을 당해왔음을 안 허강은 상소문을 내걸고 길유의 악행을 알리기에 나섰다. 그런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유배를 갔던 홍인방이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정도전과 함께 그들이 존경하는 스승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그들은 힘이 났다.

 

성균관 유생들이 그토록 믿었던 홍인방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고문을 당하며 홍인방은 스스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를 버렸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소신을 버렸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성균관에서 그는 스스로 길태미를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해준 홍인방은 더는 그들이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위기에 처한 길태미에게 힘을 주고 이를 통해 고려 말 핵심 인력이 된 홍인방의 악행은 그 누구보다 악랄할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사대부의 강직함을 대변했던 홍인방이 이제는 적이 되어 그들을 탄압하는 인물이 되어버리는 것 역시 현대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변절의 역사이기도 했다.

 

 

성균관을 그만 둔 강찬성을 증인으로 내세워 길유와 이씨 삼형제를 단죄하려던 허강의 행동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았다. 악을 바로잡기 위해 나섰던 허강은 태형을 받아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 술로 마음을 달래던 그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을 꾸민 홍인방은 이씨 삼인방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를 통해 길태미가 그토록 원하는 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권력에 눈이 먼 홍인방으로 인해 졸지에 살인자가 되어버린 허강.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방원이 짓이었다.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이씨 삼인방을 죽인 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홍인방이 돌아온 후에도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던 이방원에게도 찾아왔다. 스스로 절개를 버리게 하거나 자문을 새겨줄 테니 평생 수치 속에 살아가라는 그들의 강요 속에 이방원은 곤혹 속에서 맹자를 태우는 것을 택했다.

 

어린 방원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분노를 깨우는 이유가 되었다. 잠들어 있던 분노를 깨운 이 사건으로 인해 이방원은 후에 잔인한 철혈군주로서 시작을 알렸다. 자신이 원망했던 아버지의 굴욕을 자신도 경험한 방원. 그는 그 분노를 잔인한 복수로 대신했다.

 

인의 씨앗이고 이를 통해 보다 강렬한 존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이미 무의미해졌다. 믿었던 스승 홍인방마저 길태미 편에 선 홍인방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선과 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도 악도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홍인방에게 방원은 자신은 '정의'를 선택하겠다고 선언한다.

 

 

죽음의 고통 앞에서 스스로 소신을 버리고 몸을 사린 홍인방은 스스로 선문답을 던지듯 스스로를 위한 위안만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홍인방에게 방원이 던진 '정의'는 그래서 속이 후련해질 정도였다. 선하기보다 정의롭고 싶다는 방원은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 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서 정의롭습니다"라는 포효는 속이 후련할 정도였다.

 

실제 우리 현대사에서도 악을 품고 안아주며 그들에게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 그들에게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 악은 그저 악일뿐이다. 그런 선한 행동은 결국 악을 더욱 악랄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악랄함은 결국 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정의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악을 포용해준 선으로 인해 악은 더욱 거대하고 악랄한 악이 되었다.

 

그 잔인한 악은 자신들이 다시는 굴욕적인 순간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악랄하게 변하기만 한다.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과연 선은 정말 선한 행동을 했는지 의문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의 '정의론'은 강렬함으로 다가올 수밖에는 없다.

 

독재자는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교과서를 국정화 했다. 영구집권을 하고 자신의 악행을 그럴 듯하게 꾸미기 위해 만들었던 국정 교과서가 42년이 지나 그의 딸에 의해 다시 강압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정교과서가 의미하는 것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분노와 반대에도 눈 감은 채 강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국민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어차피 선거철이 오면 다시 자신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엇이냐는 홍인방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현재 시점 큰 의미로 다가왔다. 선으로 더는 악을 제거할 수 없음은 굳이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체험했다. 정의에 입각한 개혁이 아니면 현재의 부조리를 바로잡을 수 없음을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용 이방원이 날아오르며 점점 드라마 역시 강력한 이야기의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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