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의 세 번째 왕이 되는 이방원과 원을 몰아내고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가 되는 주체가 만났다. 둘의 만남은 결국 정도전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유가 된다. 당연하게도 이방원은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고된 왕자의 난;
정도전을 위기로 몰아넣는 묘수가 된 이방원과 주체의 만남, 역사를 비틀어 재미를 품다
이방원의 집을 찾아온 이신적과 모사된 서찰을 받고 찾은 초영은 위기를 맞는다. 어떻게든 이방원의 사지를 묶어야만 했던 정도전이 만든 묘수였다. 이방원이 무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이를 엮어내기 위한 정도전의 선택은 맞아떨어졌지만 언제나 마지막 한 수가 부족해 망치고 말았다.
연왕 시절 이방원과 만났던 주체. 둘은 비슷한 삶을 산 인물들이다. 4번째 아들과 다섯 번째 아들. 모두 스스로 칼을 쥐고 왕의 자리에 올라선 인물들. 권력에 대한 욕망이 누구보다 강렬했던 그들이 만났다는 사실은 곧 공공의 적인 정도전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정도전의 급진적인 개혁은 명의 주원장도 경계했다. 여기에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준비하고 꾸준하게 요청했다. 물론 이성계가 그 청을 듣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정도전은 사병들 훈련까지 시키며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그런 정도전을 공공의 적으로 둔 두 사람의 만남은 결과적으로 두 번의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고 결국 정도전의 죽음은 필연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국가에 맞는 국왕을 만들기 위해 가장 나이 어리고 영특했던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이성계. 그리고 그런 왕의 명을 받아 세자의 스승이 된 정도전. 그는 이미 예고된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이방원을 무력화시켜야만 했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이신적을 이방원의 남자로 만들었다.
내부에 들어가 흔들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 역할은 이신적의 몫이었다.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진 계획에 의해 이방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무명인 초영을 움직여 본거지를 쳐 모두를 잡아내겠다는 정도전의 전략은 거의 성사될 수도 있었다.
무극과 마주한 이방지가 자신의 어머니를 벨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극 역시 자신의 아들을 벨 수도 없었다. 서로의 이상과 가치가 달라 적이 되었지만 모자의 관계까지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정도전이 아닌 동생 분이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산다는 이방지의 운명은 그래서 흥미롭다.
이신적이 삼봉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초영은 분노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초영을 교살하고 자살로 위장한 그들은 이방원을 명의 사신으로 보내기로 한다. 분노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정도전의 제안에 동의한 것은 현재 상황에서 해법을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이성계마저 동의한 명 사절 제안을 받아들인 이방원은 그렇게 명을 향했고, 요동에서 이방원은 운명과 같은 조우를 하게 된다. 후에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인 주체와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운명을 타고나 유사하게 권력을 잡고 왕이 되는 두 사내의 만남은 그렇게 극적인 "죽고 싶냐"는 말로 통하게 되었다.
영락제가 연왕으로 불리던 시절인 1394년 경 이방원과 잠깐 조우를 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말을 타고 가던 이방원이 가마를 타고 가던 연왕과 마주했고, 많은 담소를 나눴다는 기록이 존재하니 말이다. 명에서는 이방원을 극진하게 대접했고 그를 칭송하기까지 했다는 기록도 있다. 죽기 직전까지 영토 확장을 위해 노력했던 주체와 이방원의 만남은 기묘하게 닮은 조선과 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1395년 명은 정도전을 자신들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를 관직에서 내려놓게 하는 방식으로 보호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전은 1398년 '왕자의 난'을 막지 못하고 이방원의 칼에 숨지고 말았다. 그런 역사적인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만남이 된 이방원과 주체.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을 드라마로 채화하는 방식자체가 이상하지는 않다. 정통 사극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이해도는 상실했지만 극적인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흥미로우니 말이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가 아니다. 역사에 쓰여 지지 않은 가상의 인물들이 중요하다. 이미 역사적 사실은 사극을 통해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그리고 역사 공부를 통해 최소한 어떤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그 변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작가는 시청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가이다.
이제 그 역할은 분이의 몫이다. 반촌으로 들어선 그녀는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세종 때에도 가장 힘든 적이었던 밀본의 수장이 반촌에서 숨어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분이가 자신의 어머니인 무명의 연향의 뒤를 이어 새로운 조직의 수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연향은 "무명은 곧 인간의 마음이다"고 외쳤다. 인간이란 완벽한 존재로 살아갈 수는 없다. 욕심도 버리고 오직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기계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조금의 욕심도 존재하고 가끔은 뒤틀리기도 하는 등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무명의 가치는 어쩌면 당연하다.
정도전은 지금도 실현이 안 되는 훌륭한 이상을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분명 세월을 거스르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역사상 가장 막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모든 권력은 왕인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의 몫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에 대한 의문부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육룡이 나르샤>는 작가의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들어진 인물들 역시 전작과 괘를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아는 역사와 작가가 만든 세상은 정교하게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은 전작의 흐름을 이어가는 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이신적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고, 분이의 반촌 행도 자연스럽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현재 사회로 정의된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다.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역사 속 상황들을 통해 되돌아보고 교훈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렇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고려 말 부패한 권력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 우리와 동일하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부패한 권력들에 의해 나라의 운명마저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의 힘은 강력하게 다가온다. 이방원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정도전을 제압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는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초반 명확해 보였던 가치들은 조금씩 상쇄되더니 이제는 이방원을 연기하는 유아인의 존재감만 강렬하게 다가올 뿐이다. 정도전에 대한 해석에 대한 이견들이 분분한 상황에서 남은 아홉 번의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마무리할지 궁금해진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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