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전 6월 항쟁 중 연세대 앞에서 이한열은 쓰러졌다. 이 순간은 대한민국의 정치 민주화를 위한 강력한 도화선이 되었다. 박정희 독재가 무너졌지만,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을 희생양 삼아 체육관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런 독재와 맞서 싸우던 수많은 이들은 민주화를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어머니의 기억과 사진사의 기록;
1년 만에 공개된 6월 항쟁 30주년, 킴 뉴턴이 기록했던 이한열 열사
참혹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6월 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를 권좌에서 내려 서도록 촛불 혁명을 할 수 있었다. 국민들은 그렇게 조금씩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연세대 2학년 생이었던 이한열은 학교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직사로 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은 그런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었다. 전두환은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국민을 희생 시켰다.
전두환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던 노태우에게 정권을 이양했고, 이를 막고 대통령 직선제를 외친 수많은 이들은 그렇게 잔인한 국가 폭력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은 자신의 꼭두각시들을 앞세우고 노태우에게 민정당 후보로 선택했다.
권력을 나눠 가지며 호가호위했던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맞서는 이들을 잔인하게 제압했다. 그 모든 것은 기록되어져 있다. 80년 광주에 한스 페터가 있었고, 87년 서울에는 킴 뉴턴이 있었다. 그들이 찍은 사진은 그날을 기록하고 있었다. 킴 뉴턴은 도쿄 주재 특파원이었다.
88년 올림픽을 개최하는 서울. 대한민국의 다양한 모습을 담기 위해 제주도와 다양한 곳들을 촬영하던 킴 뉴턴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며 시대의 목격자가 되었다. 단순히 한국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왔던 사진 기자는 독재에 맞서는 성난 국민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최루탄이 터지는 현장에 방독면도 없이 촬영을 하던 킴 뉴턴은 그렇게 6월을 기록해 나갔다. 그리고 연세대 정문을 촬영하던 그는 그날의 모든 것을 목격했다. 어느 날 보다 많은 최루탄이 터졌던 그날 이한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들. 가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편. 한가하게 낮잠을 자던 어머니는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깼다. 그리고 울린 전화기 너머에서는 한열이가 쓰러졌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병원에는 연세대 학생 100여 명이 병실을 지켰다.
시체를 탈취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학생들은 병원을 지켰다. 부모님이 함께 하고,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 병실을 키졌지만, 이한열은 27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호언철폐''독재타도'를 외치던 연세대 2학년 학생 이한열은 직사 최루탄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애리조나 투산에서 본교 교수가 된 킴 뉴턴은 학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에게 영화 <1987>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그가 직접 목격했던 그날의 기록이 모두 담겨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최루탄 직사 사망을 담은 이 영화는 킴 뉴턴에게도 특별했을 것이다.
연세대 시위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우석훈 교수는 그날을 기억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이다. 지독하게 터지던 최루탄을 피해 잠시 쉬던 그에게 들려왔던 이한열 직사 소식과 그의 아버지와 나눴던 마지막 이야기. 유학 후 돌아와 이한열 아버지를 만나려 했지만,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에 좌절했다고 한다.
경제학자이자 교수가 된 그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한열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시위를 해도 살아있으면 좋겠다"며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모든 이들에게는 지독한 트라우마로 남겨졌을 수밖에 없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이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5년 후 사망했다. 아들과 남편을 보낸 어머니는 당연하다 했다. 아들을 보내고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둘 중 하나는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했다. 어머니는 자신을 살 수 있게 해준 것은 유가협이라 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사망한 이들의 가족들이 모인 유가협. 같은 이유로 모인 이들은 또 다른 가족이었다.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들. 그런 그들이 있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어머니는 벽에 가득한 사진들을 보며 이들 모두가 다 자식들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 공간이 주는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게 한다.
30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킴 뉴턴은 87년 이한열이 피격 당한 장소를 연세대 학생들에게 묻지만 아는 이들은 없다. 이미 잊혀져 버린 기억들 속에서 그는 꽃을 한열 동산 기념비에 추모했다. 그렇게 87년 30주기 기념식에 함께 한 킴 뉴턴은 그날을 기록한 사진 한 장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역사적 순간을 담은 사진 원본을 이한열 열사 어머니에게 건넨 킴 뉴턴의 마음은 복잡했을 듯하다.
이한열 열사 사진을 든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성호와 태극기를 든 사회부장 우현. 그리고 그 뒤로 중무장한 전경들의 모습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30년 전 그들은 이제 국회의원과 배우가 되었다. 그 역사적 순간을 찍은 킴 뉴턴과 이들은 30년이 지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6월 항쟁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한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 해 MBC 경영진에 의해 제작이 중단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 방송된 <어머니와 사진사>는 담담하지만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그날을 기록한 사진 기자와 그날 이후 시간이 멈춰버린 어머니의 기억은 그날을 반추한다.
30주년이 된 6월 항쟁을 담아낸 <어머니와 사진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킴 뉴턴이 극우 세력들의 시위 현장을 찾아 6월 항쟁의 희생이 없었다면 현재 당신들이 이렇게 편하게 시위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발언은 강렬하게 다가왔다.
6월 항쟁마저 공산주의자의 짓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절망감도 느끼지만,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평화롭게 세상을 바꿨다. 최루탄과 폭력이 난무하던 30년 전 서울의 모습을 기록했던 킴 뉴턴은 30년이 지나 평화롭게 촛불 집회로 부패한 권력을 무너트린 대한민국을 지켜봤다. 어떤 위험과 위기 속에서도 국민들은 주저하지 않았고, 그렇게 국민의 힘으로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어머니와 사진사>는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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