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가 분노하듯 세상에 멸망이 왔으면 좋겠다고 외쳤다. 누구나 그렇듯 세상에 외치는 분노와 서러움 등 복잡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실제 멸망이 우리 집으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이란 긴 제목을 가진 이 드라마는 첫 방송에서 흥미로운 전개를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은 세계관이 있음을 고지했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그 미지의 세계로 함께 여행을 갈 것인지 질문을 했다.
28살인 탁동경(박보영)은 라이프스토리 웹소설 편집팀 주임으로 일하고 있다. 첫 등장부터 의사에게 시한부 판정을 받는 장면은 그래서 특별했다. 주인공이 첫 등장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치료를 해도 1년, 하지 않으면 3개월이라는 의사의 진단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조직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진일 수도 있다. 다만, 명확한 것은 이제 동경에게 남겨진 삶은 100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멍하기만 했던 동경에게 정신 차리게 만든 사건은 사귀던 남자가 알고 봤더니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다.
임신한 남자친구의 아내가 등장해 얼굴을 물을 뿌리고, 온갖 악담을 해댄다. 자신도 피해자이지만, 유부남을 유혹한 상간녀가 되어버린 동경은 황당할 뿐이다. 그저 그런 한심한 X와 잘 사시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길에 그녀는 쓰러졌다.
황당하지만 직접 병원까지 데려간 동경은 자신을 속인 남자 친구의 임신한 아내에게 처음으로 시한부 판정 소식을 전했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는 자신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부모님 제삿날 하나 있는 남동생은 제주에 놀러 갔다며 돈을 달라고 보챈다. 정신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재사상은 없고, 그날은 케이크를 산다.
캐나다로 이민간 이모는 언제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이모(우희진)는 동경과 선경에게는 특별한 존재였다. 동경이 다 큰 후에야 남편을 만났고, 그렇게 캐나다로 이민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남겨진 두 아이가 안쓰러운 이모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날이 부모님을 떠난 보낸 날이다. 기괴할 정도로 현실감 없는 절망의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동경이 10살인 나이에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주변 친척들은 자신들에게 혹이 될지 몰라 아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낼 궁리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10살 동경은 세상의 모든 풍파를 견뎌내며 어린 동생과 함께 버텨냈다. 물론 이모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것도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서른도 되지 않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세상에 멸망이 왔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쏟아냈을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한 남자가 자신의 집을 찾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동경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날 그 병원에 의사 가운을 입고 살인사건으로 피투성이가 된 이들이 들어오는 응급실에 있던 이가 멸망(서인국)이었다.
죄를 지은 자에게 멸망을 선사하는 일. 그건 그들에게 손쉬운 죽음이 아니라 살아서 죗값을 달게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멸망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바로 '삶' 그 자체이니 말이다. 멸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소녀신(정지소)이 멸망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켰다. 자신이 만든 정원에서 멸망은 그저 나비와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소녀신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생일이니 누군가의 소망이 되어주라는 소녀신의 이야기에 멸망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 세기에 한 번 혹은 한 문명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생일을 맞았는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누군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소망을 들어줘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 지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멸망을 외치는 이가 있었다. 그게 바로 동경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을 찾아온 남자. 문을 열자마자 말도 안 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착시 현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꿈에까지 등장해 실제인지 꿈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이 모든 상황들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믿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이 남자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자 실제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지하철 안에는 자신과 멸망이라고 이야기한 남자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자꾸 자신에게 소원을 말해보라는 이 남자를 그저 시한부 삶의 부작용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 동경이 멸망의 손을 잡은 것은 우연과 같은 필연 때문이었다. 길을 건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쓰러진 동경. 하지만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트럭은 그를 덮치려 했다. 이 순간 마법과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동경은 잘 모르지만 자신을 몰래 찍던 남자를 추격하다 싱크홀로 몰카범이 빠지는 상황 역시 멸망이 만든 결과였다. 동경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시간을 멈춘 채 다가온 멸망. 그는 이야기했다. 자신의 손을 잡든, 아니면 죽든 선택하라고 말이다.
100일간의 로맨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과 멸망을 선사하는 신인지 저주받은 운명인지 알 수 없는 이의 사랑은 과연 가능할까? 그리고 우연과 같은 필연으로 만난 이들은 그 사랑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멸망이 왜 멸망이 되었는지 말이다.
김은숙 작가 밑에서 일을 했던 임메아리 작가의 드라마 데뷔작은 영화 <뷰티 인사이드>였다. 이는 창작물이 아닌 각색이라는 점에서 본인의 작품이라고 하기 모호한 지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임메아리 작가의 진짜 데뷔작은 <멸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김은숙 작가 특유의 세계관이 이 작품에서도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보조작가로 일을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세계관을 꾸미고 확장하는 과정들을 함께 해왔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멸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흥미롭기만 하다. 김 작가와 다른 임 작가 특유의 세계관과 재미를 담아낼 수 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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