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자신의 과거를 들추는 행위를 한 모든 이들을 잡아 온갖 고신도 모자라 죽이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나주에 붙은 벽서로 인해 소인들은 다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세책을 만들고 배포한 이들 역시 이 상황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핏빛으로 물든 그날 영조와 세자의 끈 역시 허무하게 끊기고 있었습니다.
나주 벽서 사건의 등장;
언론을 탄압하는 현실을 빗댄 영조와 서균의 분노, 시의적절한 상징이었다
영조와 세자의 대립 관계가 고조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한 상상이라는 점에서 결과마저 다르게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뒤주에 갇힌 채 처참하게 죽은 세자를 카운트다운하고 있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13회 들어 신념에 가득 차있던 세자가 모든 것이 꺾인 채 스스로 몰락하는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영조를 비난하는 세책들이 난무하고 이것도 모자로 나주에서는 벽서까지 나붙으며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나락을 향해가는 이 상황은 영조의 광기까지 이어지며 통제 불능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직 영조에 의해서만 통제가 가능한 현실 속에서 피의 분노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론이 주도한 나주 벽서 사건으로 인해 이를 바로잡기 위해 편전회의에 들어서려는 세자는 동궁전에 막히고 맙니다. 편전 회의를 이끌던 세자를 회의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은 영조는 친정을 선언했습니다. 과거 세자에게 부탁하던 것과 달리, 영조에게 이제는 누군가에게 이유를 제시하지도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치 감각보다는 양반으로서의 가치만 높았던 소론의 신치운은 임금 앞에서 당당하게 모든 것은 자신이 벌인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너무 당당해서 모두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신치운은 영조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눴고, 영조는 분노해 소론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과거 영조를 통해 정권을 잡던 시절 노론이 소론을 붕괴시키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력을 다해 맹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과거 속에서 벗어나고자 기를 써왔던 영조는 한 순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균역법을 강행하고, 스스로 청렴한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는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습니다.
아들인 세자가 맹의의 내용을 들먹이며 탓을 할 때도 왜 자신이 그런 곳에 수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여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맹의와 그 결과에만 집착한 세자는 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고민보다는 권력의 핵심인 임금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권력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존재했지만 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고민이 적었던 세자는 정치적인 감각은 아직 완전히 영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동궁전에 세자는 위폐 되고 대전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영조는 철저하게 이번 벽서 사건을 뿌리 채 뽑기로 작정합니다. 세책의 모든 유통을 막고 이에 가담한 모두를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담의 아버지인 서균 역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귀가 있어서 들었고, 입이 있어서 말했을 뿐입니다"
"백성들의 말할 자유를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다니 이건 임금님 아닙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 칼 없이는 백성들 상대 못하는 거 창피하지 않습니까? 입이 있는 자들은 말을 하시오. 훗날 당신 자식들이 뭐라고 할 것 같소. 오늘 지금 이 순간 가장 끔찍한 것은 저 악한 무리들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선한자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 아니었냐고 묻는다면 그때 당신들은 뭐라고 답을 하겠소. 그러니 이 임금님을 말리시오. 이건 미친 짓이라고 당장 이 미친 짓을 멈춰요"
오늘 방송의 핵심은 세책을 만들어 오던 서균의 이 분노였습니다. 임금 앞에서 임금에게 미친 짓이라고 외치는 그는 형틀에 앉은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백성들의 말할 자유를 막는 임금은 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말할 권리를 잔인하게 짓밟는 임금에게 부끄럽지 않느냐는 말까지 할 정도로 서균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칼 없이는 백성을 상대 못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느냐고도 했습니다. 저 악한 무리들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선학자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을 지적하는 서균의 발언은 섬뜩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영조에 의해 탄압을 받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굴욕보다는 당당하게 문제를 지적하는 서균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고 있었을 듯합니다. 언론은 이미 전 정권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했고, 언론 스스로 권력의 충직한 개를 선언한 상황에서 그 언론의 역할은 특정 권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대통령의 한 마디에 검찰은 특수부까지 즉각 만들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을 조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모든 댓글들을 검열해 처벌을 내리겠다는 그들의 공표는 2014년 대한민국이 과거 박정희 시절로 회귀했음을 선언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개인의 이야기까지 엿듣겠다며 모든 사이트 검열에 나선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영조시절과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입니다. 작가가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과거가 아닌 현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균의 이 분노는 결국 작가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분노이기도 했습니다.
달달하고 뻔한 이야기가 아닌 무겁고 어려운 정치 이야기를 사극으로 풀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흔한 로맨스 하나 나오지 않고 오직 정치 대결이 이어지는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로서는 너무 무겁게 생각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지금처럼 정치 혐오증이 대단한 상황에서 농익은 정치 드라마는 외면을 받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는 창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무척이나 흥미롭기만 합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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