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상을 그렇게 사랑하던 영도는 왜 그렇게 웃으며 그녀를 보내줄 수 있었을까? 은상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에 감동해서? 떠나버린 어머니가 탄이의 어머니와 기억이 겹쳤기 때문에? 그저 탄이가 불쌍해서? 그 무엇도 아닐 것입니다. 영도가 은상과 이별을 고하는 장면은 바로 <상속자들>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18살 소년의 성장기였기 때문입니다.
18살 소년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숙명과도 같은 아버지를 넘는 방법은 스스로 어른이 되는 방법뿐이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그 성장 속에는 단순히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는 성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자아를 형성해가며 성숙해져가는 과정은 순간순간이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많은 상처들이 아물며 단단해지는 순간이 바로 곧 성장이라는 사실을 <상속자들>은 잘 이야기해주고 있었습니다.
은상을 위해서 스스로 은상을 멀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힘겨웠던 탄은 스스로를 망가트리며 그 힘겨움을 참아내고 있었습니다. 탄이의 망가지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하는 것은 단순히 가족만은 아니었습니다. 3년 전 서로의 마음을 상처내고 적이 되어버린 친구 영도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격지심이 만든 상처는 어린 그들에게는 허물어트리기 어려운 거대한 벽과도 같았습니다.
탄이와 영도의 오랜 감정의 벽을 허물게 해준 것도 아이러니하게 은상이라는 존재를 함께 좋아하면서 부터였습니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사랑하면 세 명의 관계가 모두 깨질 수도 있는 것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은상은 탄과 영도에게 영원히 특별한 존재가 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망가져가는 탄이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영도는 주먹다짐으로 폭주를 막지만, 마음에 난 상처로 인해 무너진 탄이는 좀처럼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탄이를 보며 아버지는 노여워하고, 어머니는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소원했던 형은 그를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담일 수밖에 없었던 탄이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만 썼던 원은 이제 조금씩 어른이 되가는 탄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주를 사랑하는 원이지만, 그런 사랑 못지않게 제국그룹의 실질적인 오너가 되는 것이 목표인 원은 항상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탄이는 사랑이 우선이지만, 원에게 사랑은 자신의 욕망의 뒤에 서 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주가 원에게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게 꿈"인 남자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원이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탄이는 "은상이 자기 세상이기를 꿈꾼다"며 정의합니다.
세상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 세상이기를 꿈꾸는 남자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원과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사랑 하나만을 가지겠다는 탄이는 그래서 조금씩 형제의 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열정을 가진 동생 탄이를 조금씩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원은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동생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탄이가 전략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김 회장의 호출로 서울로 올라와 집으로 돌아가던 은상은 우연히 마주친 탄이를 모른 척 지나쳐야 했습니다. 만나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한 탄 역시 그렇게 지나가야 했지만, 그는 다시 돌아서 은상이 탄 버스에 함께 탑니다. 그렇게 은상이 도망치듯 사라진 새로운 집으로 함께 합니다. 은상의 뒤만 따라가는 탄이와 그런 탄이를 모른 척 집으로 들어서는 은상의 모습은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뒤이어 더는 참지 못하고 탄이를 찾는 은상과 뒤에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는 탄이의 모습은 그들이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을 들게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찾는 이 과정의 반복은 방해자가 있으면 더욱 강력해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더 망가질 곳도 없이 망가져버린 동생을 방치할 수 없었던 원은 직접 은상을 보러 내려갑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찾도록 돕겠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복잡하고 선택하기 어려울 때는 단순하게 생각하라며 돌아갈 명분마저 알려준 원으로 인해 은상은 탄이 곁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김 회장에게도 당당하게 자신이 탄이를 좋아한다고 밝혔지만, 그 돈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은상에게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원이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안은 은상에게는 큰 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상의 변화와 발맞춰 한기애의 선택도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탄이의 방황을 어디에 화풀이 할 수 없었던 김 회장은 기애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하며 몰아붙였습니다.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던 여자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와 현재의 자리에 있다는 식의 모멸적 발언은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더는 그 거대한 성에서 살 수 없었던 기애는 집을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김 회장에게 억압당한 기애는 몰래 택시를 타고 도주하는 무모함까지 보입니다.
학교 앞에서 탄이를 찾는 기애와 그런 모습을 발견한 영도. 급하게 탄이를 만나 어머니와 만나게 해주는 영도의 모습 속에는 3년 전 자존심 때문에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자신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황급하게 탄이를 찾는 슬픈 기애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찾던 3년 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만나기로 했던 학교 앞 분식집 벽에 남겨져 있는 "잘 지내니... 영도야"는 멀리서도 여전히 아들 영도를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은상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받고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던 영도. 그는 어머니가 그렇게 떠난 후 더는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절대 돈이 남들에게는 평범한 가족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정과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영도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래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영도는 다시 학교에 나온 은상과 잔치국수를 먹자고 했습니다.
국수를 먹으며 영도는 이별을 통보합니다. 일방적인 그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짝사랑을 마무리하는 영도의 모습은 진짜 남자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고 싶었던 여자에게 먼저 이별을 고하는 영도는 이미 남자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친구가 아닌 여자로 생각했던 은상과는 영원히 친구는 하지 않겠다며 독한 이야기를 했지만, 영도는 그렇게 떠나는 것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은상을 자신의 첫사랑으로 남기겠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영도는 그만큼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지고 무너졌던 탄이는 은상이 다시 돌아오자 용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계기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보호해야만 하는 어머니마저 떠난 그곳에 더는 있을 이유가 없어진 탄이는 아버지 겉을 떠나 어머니의 가족으로만 살겠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대결을 선언했습니다.
원과 탄이를 불러오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 쇼까지 벌였지만, 그의 곁에는 금전적인 관계가 남아 있는 호적상의 부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두 아들과 동거녀마저 찾지 않는 쓸쓸한 병실에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아들들을 길들이기 위핸 노력만 하는 노쇠한 어른의 모습은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18살 생일을 원이 만큼 화려하게 준비한 김 회장에 맞서 탄이는 확실한 한 방을 준비합니다. 그 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되는 싸움이었지만, 탄이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이제는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어서 어른으로 성장했음을 선언하는 자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은상을 초대하고 가장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히고 함께 파티 장소로 향하는 탄이는 당당했습니다. 떨고 있는 은상의 손을 잡으며 "오늘 하루 힘들겠지만 그래도 직진"이라는 말로 정면 돌파를 선언합니다.
미성년자의 진심은 사춘기의 투정 정도로 생각한다는 극중 탄이의 불평은 어쩌면 이 드라마를 폄하하는 이들에 보내는 김 작가의 메시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0대 소년 소녀들의 격정적인 사랑을 그저 재벌 2세들의 돈놀이 정도로 치부된 상황에서 이 드라마가 진정 보여주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 한 마디는 그래서 재미있었습니다. <상속자들>은 우리 시대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재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그들의 삶을 드라마를 통해 다시 본다는 것이 유쾌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그들의 삶을 드라마로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보도록 강요하는 것 역시 말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재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탐미하는 드라마는 아니었습니다. 김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재벌들의 탐미적 삶이 아니라,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격정적인 사랑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속자들>은 재미있는 성장 드라마였습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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