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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송곳 3회-지현우가 찾은 역설적 자유, 과거보다 더 악화된 노동환경

by 자이미 201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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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 마트에서 근무하는 이수인 과장과 노동 상담소 소장 구고신을 통해 2000년 초반 대한민국의 노동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송곳>은 매력적이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도 많은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이지만 드라마 자체가 보여주는 가치만으로도 <송곳>은 너무나 값진 드라마이다. 

 

역설적 자유는 곧 희망이다;

2003년보다 더 열악해진 노동환경, 우리가 송곳을 봐야만 하는 이유

 

 

 

 

푸르미 마트에서 주목받던 이수인 과장은 어느 날 몰락하고 말았다. 그에게 주어진 정부장의 일방적인 부당해고 지시를 거부하는 순간부터였다. 관리자가 자신의 일을 거부하고 노동자의 부당해고를 막는 순간 그는 푸르미 마트에서 완전히 고립된 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직접 파견된 점장인 가스통은 자신이 아끼고 주목했던 이수인이 자신의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절망을 선사했다. 이수인이 근무하는 야채청과 코너 노동자들에게 그 어떤 혜택이나 희망도 없다고 선전포고를 한다. 이는 노동자 돕는 관리자를 오히려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이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조의 존재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드라마는 참 보기 싶지 않다. 너무 일상적인 것은 바로 노조다. 모든 사업체에는 노조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와 권익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조는 여전히 학대받고 비난받는 대상이고 이유가 된다.

 

무노조 기업이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 되었고, 이런 현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노동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학교에서 이미 노조 설립과 활동에 관련해 수업을 하지만 프랑스 자본이 만든 푸르미 마트에서는 노조 설립을 막고 있다는 사실에 수인은 혼란스러웠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교육기관에서 노조에 대한 교육을 하는 프랑스 회사가 한국에서는 노조 설립을 방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수인에게 구고신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되니까. 노조를 탄압해도 상관없는 나라에서 누가 노조 설립을 부추기고 노동자의 권익에 앞장서겠느냐는 발언은 아프게 다가온다.

 

"사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 다"

 

노동 교육을 하던 구고신이 내던진 이 발언은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외치던 자들이 상사가 되면 오히려 노동자를 탄압하는데 앞장서는 경우도 많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던 세대들은 민주주의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정치인이 되고 사업가가 되며 우리 사회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섬뜩한 것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성취한 그들은 그 민주주의 울타리에서 이를 짓밟는 행위를 아무렇게나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더욱 악랄한 존재로 변한 이 한심한 자들은 변절이라는 이름으로 모자랄 정도로 탄압하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아가는 괴물로 변해 있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아는 놈이 더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다가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사는 곳이 달라지니 풍경도 달라진 다"는 말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

 

노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수인과 관리자인 그의 분개가 그저 착한 사람의 분노 정도로만 생각한 고구신. 매일 찾아오는 수인에게 구신은 노조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현장 학습을 하러 가자고 부른다. 부당노동행위에 맞서 회사에 출근하려는 노동자와 이를 막아선 용역 깡패들과 노동자가 아닌 깡패들을 비호하는 경찰들의 행위를 목격한 수인은 당황한다.

 

그동안 본적도 없는 이 황당한 현실 속에서 수인이 느끼는 고통은 그저 마음으로 품었던 현실과는 너무 달랐다. 불법 파견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의 현실이 과거나 현실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파견이라는 형식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에게 값싼 노동력을 소진해야만 한다. 언제든 손쉽게 해고가 가능한 파견 노동자들의 삶은 그렇게 위태롭고 힘겨울 수밖에는 없다.

 

파견 노동자의 문제가 심화되고 고착화되자 현 정부는 노동유연화라는 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을 아무 때나 손쉽게 고용주가 해고할 수 있는 악법을 강행했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노동자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1회용으로 만드는 이 한심한 현실이 바로 2015년의 대한민국 노동 현실이다.

 

"노조 변호사 하던 분이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왜 자꾸 데모해요?"

 

집회 신고를 하러 온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내뱉은 이 발언은 한심함으로 다가온다. 노조 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현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하는 행태는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 상담소의 소진의 전화를 받고 경찰서로 간 수인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측에서 산 달리기 용역과 집회 신고를 건 달리기를 한다. 올곧은 성격의 수인의 장점은 이 달리기에서도 잘 드러났다. 부정출발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다친 의경이 걱정되어 관리자에게 문의를 하는 모습까지 수인의 캐릭터는 명확함으로 다가온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오히려 독이 되는 현실 속에서 수인의 고민은 커진다. 그저 부당한 권력에 분노한 관리자의 모습일 뿐이라는 구고신의 독설은 당연함으로 다가온다. 당신 일도 삶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상황도 당연함으로 다가온다는 '제3자 효과 이론'은 씁쓸하게 다가온다. 그게 사실이니 말이다.

 

이겨도 지는 날들의 연속. 진다고 해도 잃을게 없는 싸움에서 수인의 싸움은 아니라는 구신의 지적은 현실이다. 하지만 수인이 언급한 "소장님은 뭘 했습니까?"는 <송곳>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잘 보여주었다. 명분도 없이 떠밀려나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수인의 분노는 통쾌함으로 다가온다.

 

그저 구경꾼의 위치에 있던 관리자 수인이 그저 어설픈 의협심이 아닌 진정 변화를 이끄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과 친해져야 노조도 만들 수 있다는 고신의 이야기를 듣고 수인은 적극적으로 그들 곁으로 향한다. 함께 식사를 하려하고, 노동자들의 카트 놀이까지 참여하는 등 나름 열심히 그들 곁으로 다가서지만 수인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다.

 

희망을 가지고 대하던 관리자들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선이 그어졌다. 기대할 것이 없어진 현실 속에서 수인의 대응 방법도 완벽하게 변했다. 프랑스인 점장에게 보내던 미소도 사라지고, 부장의 행동에 수긍하던 모습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관리자가 직접 매대에서 일하는 것을 지적하는 부장에게 그렇다면 노동자를 더 뽑으라고 대응하는 수인. 노조에 가입하라는 제안을 하는 수인에게 다가와 분노하는 부장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노조 가입하라고 권유 중인데요"는 그의 대답은 이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하게 했다.

 

 

군 시절 오물 투성이 흙탕물에서 훈련을 하던 수인은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군대에서 상사가 시키면 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한 번 그 오물을 뒤집어 쓴 후 어떤 훈련도 더는 큰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이미 더러워진 상황에서 이후 땅을 기고 무슨 짓을 해도 더 나빠질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 문화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당시의 체험은 수인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오물을 뒤집어 쓴 후 만끽한 '역설적 자유'는 곧 용기와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는 수인이 단단해지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수인이 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왕따를 자처했음을 몰랐던 그들 역시 본격적으로 불법 해고를 감행하는 사측의 행동으로 인해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연대하고 거대한 갑에 맞서 싸우게 도리 수밖에 없다. 그 험난하고 힘겨운 과정을 그들은 이제 시작하려 한다.

 

10여 년이 흘렀지만 노동 환경이 달라진 것은 없다. 노조를 설립하고 부당한 고용주들의 행위에 맞서 싸우는 행위는 과거나 지금이나 힘겹고 어렵기만 하다. 힘겹게 얻어낸 노동법은 위정자들에 의해 집요함으로 다가온다. 더욱 정교해진 재벌들과 위정자들의 합작품은 노동자들을 완벽한 일회용으로 만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송곳>이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 우리를 대변하는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도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노동 환경은 처참함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이어지며 청년 실업은 극대화되고 있다. 노동 환경이 열악해지며 청년 실업만이 아니라 중년들의 취업 대란도 모든 노동 시장과 환경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자리가 한정된 상황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더욱 추락하고, 불안한 노동 환경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이유로 다가온다. 분노하는 사회는 다양한 분노 범죄의 온상이 되고, 그렇게 터지는 분노들은 안타깝게도 힘없는 사람들의 이전투구처럼 다가온다. 

 

대의 민주주의 사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의 몫이다.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우리 모두가 가진 투표권에 달려있으니 말이다.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면서도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은 바뀔 수 없다. <송곳>은 그래서 우리에게 송곳이 되라고 이야기한다. 송곳이 되지 않는 한 세상은 결코 우리를 위해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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