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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신데렐라 언니 4회-이미숙을 넘어선 문근영의 미친 존재감

by 자이미 2010.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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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서 보는 것이 제 맛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하루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남의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고는 하지요. 그러나 때론 이야기의 힘을 넘어서는 존재감에 빠져 드라마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문근영에게 말이지요.

심화된 관계, 지속된 경계


1. 사랑이 만들어낸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시작

3회에서 시작한 효선의 도발은 잠재되어 있던 악한 기운을 끄집어냈습니다. 효선이 좋아하던 남학생을 은조가 차지해서라기보다, 그런 동기로 인해 자신을 끄집어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었겠죠. 한번 틀어진 그들의 관계는 서로 마주보며 달리는 기관차처럼 위태롭고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지독한 '머리채 잡고 땅바닥 뒹구는 싸움'으로 폭발해버립니다. 이 일로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는 그들. 그런 그들의 상황이 살아왔던 인생을 넌지시 이야기해줍니다. 사랑을 받아왔던 효선은 여전히 강자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너무 쉽게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해도 자존심에 상처 받을 일이 없으니 말이지요. 회초리가 부러지고 때리는 이까지 그 독함에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은조에게 삶은 그렇게 버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자신을 잡아줄 사람도 막아줄 사람도 없어 외로웠던 은조에게도 새로운 의미가 다가왔습니다.

자신을 처음으로 따뜻하게 감싸준 남자. 자신의 밑바닥까지 안아주는 남자 기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요. 모든 사람이 효선을 사랑해줘도 은조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싶은 단 한사람이 곁에 있으니 말이지요. 무식하게 버티는 은조와 싫어서 도망친 기훈.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배워가며 사랑도 함께 키워내기 시작합니다.

후처의 자식으로 풍요 속의 빈곤처럼 외롭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기훈에게 은조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기훈은 당연하게 은조의 아픔에 끌리게 되고 독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은조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운명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기훈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포기하고 싶었던 삶에 독하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 말이지요.

자신의 아픈 상처를 때내어 버리고 싶었던 기훈이 독하게 자신의 몫을 챙기려 한 이유도 은조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자신을 만들어내기 위함일 뿐이었죠. 비록 기훈을 사랑하는 효선의 장난으로 오랜 시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지만 말입니다.

2. 이미숙을 넘어선 문근영의 존재감

<신데렐라 언니>는 시작 전부터 문근영의 드라마였습니다. 아니라고 부정을 해봐도 그녀의 존재감은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이고 의미이기 때문이지요.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그녀는 시작부터 특별했습니다. 방송을 통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표독스러운 표정 연기는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지요.

모진 삶을 살아내면서 강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차츰 사랑을 알아가며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넘치는 연기로 풀어내는 모습은, 시청자로서는 행복한 경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역이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악해서 악한 게 아닌 환경이 만들어낸 악함은 그녀를 충분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로 작용합니다.

서우가 여리고 착하기만 했던 모습을 던지고 자신의 것에 욕심을 부리고 악으로 변해가는 과정처럼 그들은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해 같은 지점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폭주 기관차는 서로 만나면 처절한 파괴만이 있을 뿐이지만 그들의 감정 선이 합해지는 지점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뿐입니다. 악과 선이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우리가 되는 과정을 은조와 효선은 드라마에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지요.

<신데렐라 언니>에서 이미숙의 존재감은 특별합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여인은 드라마를 감칠 맛나게 만듭니다. 사랑에 어리 숙한 대성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율할 줄 아는 그녀의 카멜레온 같은 변화는 문근영과 비교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신데렐라 언니>에서 대단한 경쟁을 벌이는 이는 문근영과 서우가 아니라 초반 극을 끌어가는 것은 문근영과 이미숙이었습니다. 모녀지간이지만 모녀지간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들의 관계는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천륜을 저버릴 수 없어 함께 인 그들에게 관계란 형식에 치우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관계를 통해 살아남아야 하는 그녀들의 삶은 척박하고 힘겨울 수밖에는 없지요. 모든 것을 갖춘 남자 대성을 차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강숙은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효선에게 베풀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은조는 드러나지 않지만 충분하게 전해지는 기운으로 사랑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런 감정의 나눔이 세월이 만들어낸 기교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축적된 삶이 만들어낸 성격의 탓도 크겠지요.

표독스러우면서도 여우같은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내는 이미숙의 연기는 여전히 화려하고 대단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드라마에서는 이미숙 마저도 문근영의 상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맡겨진 배역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해내는 연기의 밀도와 폭이 넓어져버린 문근영의 연기에 이미숙의 대단한 카리스마마저도 잠식되어 버렸습니다. 

아역으로 시작해 너무 화려한 날개 짓으로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가 대학 생활을 즐기며 오래 쉬었던 연기는 정체나 퇴보가 아닌 삶을 배워나가며 터득한 생활 연기가 덧입혀져 무한하게 진화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외롭고 아픈 아이에 대한 연기는 어쩌면 문근영이기에 가능한 연기였습니다.

다른 누가 이 역을 맡아 이 정도의 아우라를 풍길 수 있었을까요? 드라마의 뻔한 관계 설정과 잔재미를 뛰어넘는 문근영의 존재감은 <신데렐라 언니>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부입니다. 여우 이미숙을 넘어서는 문근영의 대단한 연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드라마는 문근영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떠나간 남자를 그리워하며 그 동안의 아픔을 모두 쏟아내 듯 강가에서 우는 문근영의 연기는 <신데렐라 언니>의 모든 것임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아일랜드 가수가 왜 그토록 문근영을 애타게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지요. 동서양을 넘어 문근영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이미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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