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메가시티가 된 역사적 이유와 장기려 박사의 삶은 부산을 읽어내는 새로운 가치였다. 거대하고 화려하기만 한 부산 뒤에 숨겨진 진짜 부산의 모습은 그래서 흥미로웠다. 한국전쟁이 만든 부산은 그래서 많은 역사와 사연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부산이 품은 역사;
40계단에 담긴 서글픈 사연과 장기려 박사가 보여준 인간의 삶
양양 여행을 끝낸 알쓸신잡 박사들의 다음 여정지는 부산이었다. 부산은 워낙 유명해 과연 어떤 여행을 즐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라면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채워주었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관광지 외 현재의 부산이 만들어진 역사까지 확인하게 되는 여행이었다.
부산은 한국전쟁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작은 도시로 주목받지 못하던 부산이 현재와 같은 거대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마지막 보루가 된 부산. 살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며 현재의 부산이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우발적 전쟁이었다는 중론은 소련과 미국의 극비 문서가 공개되며 철저하게 준비된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소련이 무기 지원을 하고 중국은 전쟁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해 한국전쟁은 시작되었다. 200대가 넘는 전차와 한 대도 없었던 한국군의 전쟁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북한군의 동향을 확인하고 보고했음에도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헬기를 타고 대전으로 도주하고, 녹음된 대통령 말로 서울시민들을 우롱했다. 한강철교를 폭파해 시민들을 고립시키고 이승만은 부산으로 내려가 임시수도로 삼았다.
미군이 주둔하고 이승만이 임시수도로 삼은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안전한 곳으로 피난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흥남부두에서 피난한 이들 역시 부산으로 향했고, 그렇게 부산은 2천 여명이 살던 작은 도시에서 350만이 넘는 메가시티로 성장했다.
원도심은 그렇게 피난민들로 인해 만들어졌다. 산과 바다만 있던 작은 도시는 피난민들이 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현재의 부산이 되었다. 일본인 묘지 위에 집을 지은 아미동.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피난민들은 산에 집을 짓고 살며 감천 마을이 되었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40계단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통해 보다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감천 문화 마을의 골목과 40계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영화의 힘은 그래서 대단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40계단이 유명해진 이유는 피난민들의 작은 쉼터였기 때문이었다.
하천과 부두, 산까지 사람들로 빼곡했던 부산. 잠시 쉴곳도 없었던 피난민들은 40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는 장소가 되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정보가 오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부산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고바우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이 기록한 한국전쟁의 참상과 학교 교사였던 신경복 선생의 일기는 그날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김 화백의 그림 기록과 교사가 일기로 정리한 한국전쟁은 그렇게 생생한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수정동을 통해 도시 개발의 원칙과 기준을 언급하는 대목도 흥미로웠다. 도시 속 동네들은 저마다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어떤 지역이었는지, 그리고 그곳은 무엇을 품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난개발을 막고 보존하는 도시 계획은 무의미해지니 말이다.
미국 물자가 유통되던 '깡통시장'은 단순하게 통조림만 유통되던 곳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남겨진 모든 것들이 유통되던 곳. 단순히 물건 만이 아니라 영화, 패션과 음악 등 모든 문화들이 소통되는 부산의 과거는 그렇게 원도심에 다양한 흔적들로 남겨져 있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남겨져 있다. 전국의 헌책방 골목이 사라지고 있는 것과 달리, 부산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책방골목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과 커피와 함께 하는 책방골목의 가치는 이제는 부산이 아니라면 찾아보기도 힘들다.
일제 강점기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대)을 다니고 평양에서 의사, 교수를 하다 월남한 장기려 박사. 6남매 중 차남만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온 장기려 박사는 그렇게 의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돈 없는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커진 병원으로 인해 돈 없는 이들이 치료를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 했다고 한다.
자신의 돈으로 치료비를 대신하기도 하고, 처방전에 '생닭 두 마리 값을 줘라'는 치료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먹지 못해 생긴 병, 잘 먹으라며 자비를 들여 치료를 하던 장기려 박사. 그는 민간에서 시도한 첫 번째 의료보험 역시 그분이 만든 결과였다.
'청십자 의료보험'은 현재 국민의료보험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어려운 사람들이 우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가 담긴 '청십자 의료보험'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 자체를 새롭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 가장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살아온 장기려 박사.
보건병원 옥상에 있는 옥탑방에서 평생을 사신 그분은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천만 원이 든 통장 하나도 간병인에 줬다고 한다. 물레 밖에 없었다는 간디에 비해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했다는 장기려 박사의 삶은 누구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인술은 불쌍한 사람을 불쌍하게 보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누구나 인술을 할 수 있다는 장기려 박사의 발언은 그래서 더욱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돈에 매몰된 다수의 의사들로 인해 분노하는 상황에서 장기려 박사는 의사란 무엇인지 그 기준을 정해주었으니 말이다.
이산가족 상봉에 특권을 주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장기려 박사는 자신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거절했던 그는 세 번째 상봉을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고 한다. 차남이 뒤늦게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49년 만의 재회에 눈물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서신 왕래는 조금 있었다고 한다. 아내 김봉숙 여사가 보낸 편지에는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재혼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6남매를 낳은 북한에 있는 아내만 바라보며 평생 홀로 살았던 장기려 박사의 삶은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삶은 아니었다.
극적인 상황이 없어 주목 받지 못한 훌륭한 인물. 극적인 가치를 만들지 못해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장기려 박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부산 여행이었다. 주어진 한정된 시간의 삶.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장기려 박사의 삶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말이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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