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roadcast 방송이야기/Variety 버라이어티

청춘FC 부상에 좌절된 희망, 청춘은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다

by 자이미 2015. 10. 12.
반응형

청춘들의 진정한 도전을 담고 있는 <청춘FC>는 매 회 큰 감동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을 알고 시작하는 도전은 그래서 힘들기만 하다. 이 방송은 분명 많은 축구 미생들에게 큰 희망을 던져주었다.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라는 사실은 더 큰 좌절을 던져줄 수도 있다. 

 

청춘FC의 예고된 종영;

축구 미생들에게 방송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힘겨운 고통도 청춘이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이 책이 던지는 가치는 참혹하다. 청춘들의 고뇌와 고통을 애써 외면한 채 그들의 고통을 그저 청춘이니까 참고 인내하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책은 우리 시대 청춘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 대목이었다. 

 

 

<청춘FC>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다 풀어내지 못하고 낙오된 이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다. 모집 광고가 나자마자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만큼 수많은 축구 미생들은 기회를 잡고 싶어 노력했다. 어떻게든 다시 한 번 그라운드에 서서 자신이 평생 해왔던 축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된 이들은 마지막 도전을 위해 TV 앞에 섰다.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에는 부족한 그들. 하지만 열정과 도전정신 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축구를 하고 싶었고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라운드에 섰고 자신이 여전히 그라운드에서 얼마나 뛰고 싶은지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한 번 낙오되었던 이들이 모여 훈련을 하고 벨기에와 프랑스 팀들과 경기를 가지고 국내로 돌아와 다양한 팀들과 평가전과 비슷한 경기를 치르고 있다. 그라운드에 설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다는 그들의 도전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방송을 통해 그들의 도전 과정은 그대로 노출되었고 이제는 개개인의 선수들에 대한 팬 층까지 늘어날 정도다.

 

국내 경기에 직접 그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모습은 대단했다. 국내 축구 열기가 세계적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텅 빈 관중석에서 경기를 치르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은 대단함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방송의 힘이 대단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고, 절망 뒤 희망을 품고 다시 뛰는 그들에게 많은 감동을 받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청춘FC>가 큰 관심을 받는 만큼 부작용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가을이 다가오며 리그 승격제가 존재하는 K리그와 챌린지 리그에서 청춘FC의 경기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축구협회에서 청춘FC와의 경기를 지원하며 승격과 관련해 중요한 상황을 망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은 옳다. 리그에 출전하는 팀들 중 순위 경쟁에서 절박한 팀들이 청춘FC와의 경기를 하게 된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의견들도 나올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청춘FC 헝그리일레븐>는 과연 무엇을 위한 방송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방송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방송의 취지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축구 미생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그들이 축구를 다시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다는 취지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취지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프로젝트인가에 대한 의문은 분명하게 남는다. 방송 자체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로도 이런 감동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다큐멘터리라고 해야 더 옳은 예능의 강점은 곧 감동으로 이어질 수밖에는 없다. 문제는 이 감동이 과연 누구를 위한 감동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겨질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의 감동 속에 과연 주인공들이 축구 미생들이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청춘FC>는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방송으로 내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시작은 그럴 듯했지만 종영이 된 후 과연 이들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의문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이 모호한 지점에서 이 프로그램의 종영은 모두를 슬프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게 된 그들도 마지막을 준비하고 시작했다. 이 방송을 한다고 단박에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막연한 희망을 품고 도전한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이 엄습하는 것은 방송이 끝난 후 그들에 대한 관심 역시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방송이 만능일 수 없다. 피디가 출연자들을 모두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프로그램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했다는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힘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결국 새롭게 도전한 그들의 몫으로 남겨질 수밖에는 없다.

 

방송이라는 환경은 결국 서로를 이용하는 수준에서 마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방송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는 이들을 모아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면 족하다. 축구 미생들은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을 알리고 프로 선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꿀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시청자들로서는 색다른 도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사실 우린 서로 다른 기준과 관점에서 타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이견들이 나올 수밖에 없고 답 역시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청춘FC 헝그리일레븐>의 종영은 아쉬움과 조바심으로 다가오는 것은 낙오가 되었던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오지랖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 아니다. 청춘은 특권이 아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청춘이기 때문에 도전은 가능하지만 청춘이기 때문에 아픈 것도 당연하다는 논리의 두려움은 결국 현재의 대한민국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동력이다. 그 청춘들이 제대로 성장하고 꿈을 펼칠 수 없는 국가는 곧 미래가 없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는 실리콘 밸리와 같은 성공 신화를 쓸 수가 없다. 재벌 2세, 3세로 태어나지 않는 한 대한민국에서 재벌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 재벌들만이 부를 세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게 가능하도록 만든 곳이 대한민국이다. 청춘들의 도전이 막힌 현실 속에서 그들이 아픈 것은 곧 정부 정책의 문제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보다 많은 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현재에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처럼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나라를 위해 다수의 국민들을 절망으로 빠트리는 행태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논리를 위한 논리를 앞세워 재벌들이 살아야 국민들도 산다는 '낙수효과'를 내세웠던 그들. 그런 그들의 배는 불렀지만 정작 떨어지지 않는 물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은 최악의 경제난에 빠지는 게 현실이다.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결정적으로 창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조 속에서 목소리가 높아지는 '창조경제'의 허무함은 청춘들을 더욱 분노하게 할 뿐이다. 낙수와 창조 사이에 공통점은 그저 말뿐인 구호가 전부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정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듯 오직 가진 자들이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손쉽게 손에 쥘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전부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청춘들은 시작도 하기 전부터 낙오자를 이름을 주홍글씨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청춘FC 헝그리일레븐>이 이렇게 큰 감동과 의미로 다가 온 것은 우리가 곧 그들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곧 나의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감동이었다. 그런 감동만 존재한다면 그나마 현실은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뭔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안타까움이 공존한다는 것은 현실 역시 아무런 답도 존재하지 않는 지독할 정도로 긴 터널과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이 프로그램의 종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한 번 그라운드에 섰던 그들이 방송이 끝난 후 어떤 삶을 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다시 한 번 온전히 그들의 몫이 되었다. 누구도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역시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0일 방송에서 오성진은 다리 부상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줬던 홀어머니가 눈에 아른거려 한없이 서럽게 울던 오성진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함께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없고 오직 국민들이 알아서 이 모든 고통을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청춘은 진동이다. 그리고 그 진동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침묵하는 청춘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 분노해야만 하는 청춘이 침묵하는 순간 곧 그들에게 희망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청춘들이 보다 역동적으로 스스로를 위해 일어서지 않는 한, 많은 이들은 그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주입할 것이다. 방송은 끝을 알리고 있고 이제 그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나눴던 공감에서 나와 홀로 다시 사회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왜 청춘인지에 대한 고민도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