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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버리고 주먹다짐을 하는 대길과 송태하. 그들이 꿈꾸는 세상과 양반을 죽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업복이와 초복이의 꿈은 일장춘몽에 가까워지는 것일까요? 바꿀 수 없는 역사의 틀 속에 가둔 채 <추노>가 이야기하려는 의미들은 이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왜 칼을 버렸나?
1. 마지막 대결을 위한 편 가르기
상대를 단칼에 베던 그들이 버릴 수 없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선 후한 상황들을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무도가 다 끝난 것은 아니겠지만 속도 조절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겠지요. 살변은 주요 인물들에 다가가며 멈추고 극의 흐름을 만들기 위한 설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칼부림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주먹다짐을 시작한 대길과 송태하는 서로 죽일 마음이 없습니다. 제작진으로서도 주인공들의 대결을 통해 허망한 결말을 낼 수도 없는 법. 그럴 듯한 상황을 연출해 마지막을 위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기에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모두를 한 곳에 모아 해법을 전달하고 해쳐 모여를 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심리전에 능한 대길이 실력에서 밀릴 수 있는 송태하를 잡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노비였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송태하는 전투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이런 상황을 직감한 대길은 송태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노비라도 사랑했다면 그만이라는 대길의 말과는 달리 송태하는 뼈 속 깊이 양반의 가치만을 가지고 살아왔던 인물입니다.
'그런 반상제도에 젖어 살아가는 놈들이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대길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에서 송태하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길 역시 자신의 형제 같았던 최장군과 왕손을 죽인 범인이 송태하가 아닌 황철웅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극은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송태하도 스스로가 찾지 못했던 혁명의 이유를 대길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무슨 연유로 제주를 갔다 왔는지 모르지만 니 놈이 하고 싶은 것은 예전과 같이 양반 행세하며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것이라고. 왈패 같은 추노를 욕하는 송태하에게 당연하다며 그런 세상을 만든 게 모두 너희 같은 벼슬아치들이라는 말은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와 바꿀 수 없다는 자의 대립은 가치의 충돌이자 동일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해 봤기에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음에 그들은 결국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목표에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업복이와 초복이가 꿈꾸는 세상
양반을 죽이라는 밀지를 보내는 미지의 인물이 업복이 앞에 등장하며 그들에게도 반전이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인조의 어심을 읽고 일을 벌이는 좌의정에 의해 움직이는 '밀지전달자'는 마지막 순간 '노비당'을 전멸시킬 죽음의 사도로 그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노비당'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권력자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소모품일 뿐입니다. 청나라 사신들이 은밀하게 제주로 사람들을 보냈지만 모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전국적으로 '노비당'원들이 수 천 명이 있다는 '밀지전달자'의 말은 향후 그들의 역할을 암시합니다.
양반보다는 청나라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는 것은 '노비당'으로 집결된 그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조가 군을 움직여 청나라 사신들에 대항할 수는 없지만 민초들의 자율적인 저항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펼 수 있기에 '손 안대고 코푸는 식'의 해법일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노비들과는 달리 업복이는 모두가 양반이 되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상론을 설파하는 '그분'의 연설에 의문을 품은 업복이의 깨달음은 후반 '노비당'에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듯합니다.
업복이의 상생론과 초복이의 복수론을 보면 현 시대의 정치 권력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군가는 과거의 정적에게 복수 없이 상생하는 방법을 찾자 하고, 누군가는 복수의 칼날을 들이 밀며 정적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인조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살변으로 나라를 흔들 듯, 현재의 대한민국은 독재의 칼날 위에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 <한성별곡-정>이 시대는 분명하나 명확한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역사의 진실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시켰다면, <추노>는 인조라는 명확한 인물을 내세워 이룰 수 없는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편 모두 이룰 수 없는 현실의 벽에 죽어가는 주인공을 통해 미래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일 수밖에 없는 '인조의 의미'는 <추노>를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3. 인조가 <추노>의 핵심이다
인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추노>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8회가 더욱 의미 있을 수밖에는 없는 이유도 바로 인조의 어심을 따른 좌상 이경식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반란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 인조의 모습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인조에 의해 살변들은 시작되고 그 살변의 중심에서 자신의 꿈과 사랑을 위해 처절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그려지고 있는 게 <추노>입니다. 몹쓸 양반네들이 있어 도망 노비들을 쫓는 추한 추노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추노 패거리들로 인해 양반들이 존립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렇게 추노는 다시 양반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며 <추노>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권력의 단맛에 빠져 권력만 탐하는 무리들에게 쓴 소리를 하는 추노꾼들은 어쩌면 가장 진솔하고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들이 망조 든 사회를 바꾸려한다는 설정은 매력적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길과 송태하가 뜻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든 '주먹다짐'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천지호의 도움으로 기사회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손을 데리고 도망 중인 혜원을 쫓는 인조의 명을 받은 좌상 패거리들과, 지키려는 대길과 송태하의 추노는 지금까지의 <추노>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노비당'은 결국 송태하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 총을 겨누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지몽매함을 그럴 듯한 이상론으로 끌어 들여, 대의명분을 내세운 살변의 거수기로 만드는 상황은 같은 뜻을 품고 서로를 죽이는 아이러니를 만들 뿐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그들의 혁명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노>가 시작과 함께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도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들이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길이 만들고 짝귀가 운영하는 이상향이 마지막 어떤 역할을 할지가 변수이지만 중요한 인물들 중 누가 살아남을지는 마지막 회에 결론이 나겠지요.
권력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꿈마저 훼손되고 변질되어가는 <추노>의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서로를 헐뜯고 싸우게 만들어 어부지리로 얻어내는 영생의 권력을 탐하는 권력자들의 야욕을 남은 분량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담아낼지 기대됩니다.
대길이 최장군과 왕손이를 위해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장혁의 연기는 <추노>가 만든 최고의 장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가슴으로만 울었던 대길이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은 강한 남자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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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칼을 버렸나?
1. 마지막 대결을 위한 편 가르기
상대를 단칼에 베던 그들이 버릴 수 없는 주요 인물들에 대해선 후한 상황들을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무도가 다 끝난 것은 아니겠지만 속도 조절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겠지요. 살변은 주요 인물들에 다가가며 멈추고 극의 흐름을 만들기 위한 설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칼부림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주먹다짐을 시작한 대길과 송태하는 서로 죽일 마음이 없습니다. 제작진으로서도 주인공들의 대결을 통해 허망한 결말을 낼 수도 없는 법. 그럴 듯한 상황을 연출해 마지막을 위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기에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모두를 한 곳에 모아 해법을 전달하고 해쳐 모여를 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심리전에 능한 대길이 실력에서 밀릴 수 있는 송태하를 잡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노비였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송태하는 전투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이런 상황을 직감한 대길은 송태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노비라도 사랑했다면 그만이라는 대길의 말과는 달리 송태하는 뼈 속 깊이 양반의 가치만을 가지고 살아왔던 인물입니다.
'그런 반상제도에 젖어 살아가는 놈들이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대길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에서 송태하는 터닝 포인트를 맞이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길 역시 자신의 형제 같았던 최장군과 왕손을 죽인 범인이 송태하가 아닌 황철웅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극은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구분 하는 게 뭔 상관이야. 서로 마음만 주고받았으면 된 거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사람의 근본은 지엄한 것이다"
"너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세상이 이렇게 지랄 맞은 것이다. 너 같은 놈이 없었다면 나 같은 놈도 생기지 않았겠지"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사람의 근본은 지엄한 것이다"
"너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세상이 이렇게 지랄 맞은 것이다. 너 같은 놈이 없었다면 나 같은 놈도 생기지 않았겠지"
그동안 송태하도 스스로가 찾지 못했던 혁명의 이유를 대길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무슨 연유로 제주를 갔다 왔는지 모르지만 니 놈이 하고 싶은 것은 예전과 같이 양반 행세하며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것이라고. 왈패 같은 추노를 욕하는 송태하에게 당연하다며 그런 세상을 만든 게 모두 너희 같은 벼슬아치들이라는 말은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와 바꿀 수 없다는 자의 대립은 가치의 충돌이자 동일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해 봤기에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음에 그들은 결국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목표에 뜻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2. 업복이와 초복이가 꿈꾸는 세상
양반을 죽이라는 밀지를 보내는 미지의 인물이 업복이 앞에 등장하며 그들에게도 반전이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인조의 어심을 읽고 일을 벌이는 좌의정에 의해 움직이는 '밀지전달자'는 마지막 순간 '노비당'을 전멸시킬 죽음의 사도로 그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의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노비당'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권력자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소모품일 뿐입니다. 청나라 사신들이 은밀하게 제주로 사람들을 보냈지만 모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전국적으로 '노비당'원들이 수 천 명이 있다는 '밀지전달자'의 말은 향후 그들의 역할을 암시합니다.
양반보다는 청나라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는 것은 '노비당'으로 집결된 그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조가 군을 움직여 청나라 사신들에 대항할 수는 없지만 민초들의 자율적인 저항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펼 수 있기에 '손 안대고 코푸는 식'의 해법일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노비들과는 달리 업복이는 모두가 양반이 되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이상론을 설파하는 '그분'의 연설에 의문을 품은 업복이의 깨달음은 후반 '노비당'에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듯합니다.
업복이의 상생론과 초복이의 복수론을 보면 현 시대의 정치 권력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군가는 과거의 정적에게 복수 없이 상생하는 방법을 찾자 하고, 누군가는 복수의 칼날을 들이 밀며 정적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인조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살변으로 나라를 흔들 듯, 현재의 대한민국은 독재의 칼날 위에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 <한성별곡-정>이 시대는 분명하나 명확한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역사의 진실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시켰다면, <추노>는 인조라는 명확한 인물을 내세워 이룰 수 없는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편 모두 이룰 수 없는 현실의 벽에 죽어가는 주인공을 통해 미래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일 수밖에 없는 '인조의 의미'는 <추노>를 해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3. 인조가 <추노>의 핵심이다
인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추노>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8회가 더욱 의미 있을 수밖에는 없는 이유도 바로 인조의 어심을 따른 좌상 이경식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반란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 인조의 모습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인조에 의해 살변들은 시작되고 그 살변의 중심에서 자신의 꿈과 사랑을 위해 처절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그려지고 있는 게 <추노>입니다. 몹쓸 양반네들이 있어 도망 노비들을 쫓는 추한 추노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런 추노 패거리들로 인해 양반들이 존립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렇게 추노는 다시 양반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며 <추노>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권력의 단맛에 빠져 권력만 탐하는 무리들에게 쓴 소리를 하는 추노꾼들은 어쩌면 가장 진솔하고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들이 망조 든 사회를 바꾸려한다는 설정은 매력적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길과 송태하가 뜻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든 '주먹다짐'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천지호의 도움으로 기사회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손을 데리고 도망 중인 혜원을 쫓는 인조의 명을 받은 좌상 패거리들과, 지키려는 대길과 송태하의 추노는 지금까지의 <추노>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노비당'은 결국 송태하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 총을 겨누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지몽매함을 그럴 듯한 이상론으로 끌어 들여, 대의명분을 내세운 살변의 거수기로 만드는 상황은 같은 뜻을 품고 서로를 죽이는 아이러니를 만들 뿐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그들의 혁명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추노>가 시작과 함께 수없이 많은 인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유도 결국 죽음으로 모든 것들이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길이 만들고 짝귀가 운영하는 이상향이 마지막 어떤 역할을 할지가 변수이지만 중요한 인물들 중 누가 살아남을지는 마지막 회에 결론이 나겠지요.
권력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꿈마저 훼손되고 변질되어가는 <추노>의 세상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서로를 헐뜯고 싸우게 만들어 어부지리로 얻어내는 영생의 권력을 탐하는 권력자들의 야욕을 남은 분량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담아낼지 기대됩니다.
대길이 최장군과 왕손이를 위해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장혁의 연기는 <추노>가 만든 최고의 장면 중 하나일 것입니다. 가슴으로만 울었던 대길이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은 강한 남자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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