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8. 09:35

송곳 5회-안내상과 김가은의 아픈 과거, 급등하는 비정규직과 국가 역할론

대한민국 노동자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 <송곳>은 필견의 드라마다. 비정규직이 더욱 고착화되고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현실 속에서 이 드라마는 현실을 직시하고 해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작은 승리 뒤 남겨진 흔적들;

수많은 희생이 만든 결과, 노동자 스스로 분노하지 않으면 누구도 노동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푸르미 마트 직원을 부당 해고하려는 그들에 맞서 이수인 과장은 동료들과 싸웠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조금씩 왜 노동조합이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왜 노동자들에게 연대가 필요하고 그 힘이 자신들을 어떻게 도와주는지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송곳>은 우리 노동자들이 모두 지켜봐야 할 드라마이기도 하다.

 

2003년부터 시작된 이 드라마는 흥미롭게도 1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도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과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그들의 노동 환경이 얼마나 지독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단순한 과거가 아닌 현재이자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이기도 하다.

 

허 과장에 의해 부당 해고의 타깃이 된 황준철은 극적으로 악랄함에서 이겼다. 그 과정은 처참했고 증인으로 나선 노래방 도우미의 삶은 노동 현장을 지키는 구고신의 아픈 기억과 함께 하는 상처이자 현실이기도 했다. 노래방 도우미로 살아가야만 하는 그 여성도 한 노동자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노동 현장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던 남편이 전경들의 잔인한 폭력으로 완전히 망가지며 그녀의 삶도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를 키우며 살기 위해 선택한 노래방 도우미라는 직업. 그 곳에서 그녀는 수많은 일탈을 봐야만 했다. 자신의 가족을 파괴했다고 생각한 구고신의 부탁에 분노했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망가지도록 만든 구고신이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정작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고용주와 정부의 행태가 아니라 이런 현실을 깨닫게 하고 더는 그 부당함에 희생되지 않도록 각성하게 한 구고신에게 분노하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거나 분노하기에는 너무 힘이 없고 그렇다고 참을 수도 없는 그들에게 분노의 대상은 결국 가까운 사람이 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힘들게 증언을 하러 간 자리에서 '노래방 도우미'라는 직업을 들먹이며 비하하는 현실에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억울할 수밖에 없는 모함 속에서 힘겹게 위기에서 벗어난 황준철로 인해 푸르미 마트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조 가입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과장들의 위협에 불안하고 공포스러워하기만 하던 그들이 이제는 부당함에 맞서는 눈빛으로 변모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장이었다.

 

구고신과 그의 노동 사무소에서 일하는 문소진의 과거는 노동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노동자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는지를 과거의 경험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잔인한 고문 후유증으로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구고신의 과거 역시 치열한 투쟁의 흔적들이었다.

 

노동 운동을 하고 고문을 받으며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구고신. 그 지독한 현실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지만 그 노동 현장은 여전히 척박했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성공한다고 해도 힘겨운 길을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강한 탄압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할 뿐이다.

 

구고신이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는 이유는 잔인한 고문에 스스로 무너졌던 과거에 대한 참회였다. 잔인한 고문을 더는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 그 앞에 놓인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은 그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경험의 증거이기도 했다.

 

<송곳> 5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문소진의 과거다. 그녀가 처음부터 그렇게 열정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노조에도 관심이 없었고 자신은 그저 지금 다니는 직장은 잠깐 머무는 정류장 정도로 생각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자기합리화를 해왔던 그녀는 자신이 해고자의 입장이 되자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유도 없이 문자 한 통으로 해고자가 되어야만 했던 소진은 노조 결성과 함께 달라진 현실에 행복했다. 노조 결성 전에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밀어 넣어야 했던 노동자들은 여유롭게 식사라는 것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작은 행복도 오래갈 수는 없었다.

 

노조는 탄압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회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측의 악랄한 행동은 노노갈등을 부추겼다. 정류장이 아닌 정착지인 그들에게 그 직장은 전부였다. 가족을 위해 절실한 일자리에서 누구도 쫓겨나는 게 당연할 수는 없었다. 이런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측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고 그들이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는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의 노동현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사측과 정부가 구축한 이 갈등의 고리는 언제나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정규직은 스스로 노동자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라는 인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그들로 인해 비정규직 문제는 더욱 고착화되고 강화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을 품지 않고 노동 환경이 변할 수 없음에도 이미 정규직의 단맛에 취한 그들에게 비정규직은 떼어내고 싶은 혹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말이다. 그들 스스로 노동자임에도 노동자가 아니라는 자기부정은 결국 사측과 정부가 공들여 만들어 놓은 달콤한 독약이 효과를 본 결과다. 스스로 그들의 홍위병이 되어 안정적인 자리를 보장받은 그들의 행태는 노노갈등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삶의 종착지인 사람도 있다. 우리는 경쟁에서 졌다고 해서 벌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단지 평범한 것이다. 우리의 국가는, 우리의 정치 공동체는 평범함을 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이었던 소진이 노조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고신의 강의를 듣는 과정에서 나온 이 발언은 중요하게 다가온다. 학교 운동회 달리기에서도 1, 2, 3등에게만 상을 주지 꼴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며 노력하지 못해 뒤쳐진 이들을 구원할 이유가 뭐냐는 소진의 시니컬한 반응에 대한 답이었다. 

 

정류소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노동 현장이 삶의 종착지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단순히 경쟁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비정규직'이라는 벌을 받아야 할 이유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벌을 받기 위함이 아니니 말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원하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정치 공동체는 그 평범함 대신 벌을 주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우리 현실 속에서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노동 유연화'를 앞세워 정부는 노동자들을 사측이 원하면 언제든 해고할 수 있도록 도왔다. 노동자들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만드는데 혈안이 된 정치 공동체들의 행동은 그래서 악랄하다.

 

비정규직이라는 벌을 주는 것도 모자라 노동자의 최소한의 권리를 짓밟고 언제나 사측이 원하면 해고할 수 있도록 악법을 만드는 이들에게 노동이라는 것은 그렇다. 그저 노동자의 고혈을 뽑아 배부른 사측에게 더 큰 부를 안기는 것만이 전체의 이득이라고 보는 한심한 작자들이니 말이다.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희생은 무시한다. 곳간에 가득한 쌀들이 썩어가고 있어도 절대 그들은 그곳을 열어 배고픈 이들에게 나눠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직 공포를 앞세워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재벌들이 망하면 대한민국도 망한다는 이 놀라운 공포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고 많은 이들은 이런 세뇌에 잠식당한지도 오래다. 

 

국가는 철저하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에만 집착하는 그들은 금권주의 시대 재벌들을 위한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노동자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현실 속에서 희망이란 존재할 수 없는 단어가 된다. "사는게 아니라 버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미래나 희망이라는 단어는 사치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분노하고 일어서지 않는 한 누구도 우리의 고통에 눈 돌리지 않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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