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지에서는 영화 <미나리>가 연일 화제다. 국내에서는 3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기대도 크다. 더욱 조연으로 출연한 윤여정이 미국 현지에서 다양한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싹쓸이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4개의 상을 독점했다. 오스카 사상 최초로 비영어권 영화이자 아시아 영화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순간이었다. 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영화로 세계 영화계를 주도하는 미국 시상식에서 최고의 상을 휩쓴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봉준호 감독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돌아보면 과연 봉준호 감독에만 집중할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봉준호 감독이 뛰어난 존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봉 감독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발표한 영화마다 호평이 쏟아졌고, 서구사회에서도 그의 작품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할리우드 스타들도 봉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실제 <설국열차>의 호화 라인업이 갖춰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자본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봉준호 감독이 비영어권과 아시아 영화 역사만이 아니라 전 세계 영화계의 거대한 한 획을 그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흐름이 과연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단발적인 호감이가 성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대단한 업적 뒤에 많은 전문가들은 이후 어떤 작품이 나올지에 대한 관심이 크다. 봉 감독의 차기작만이 아니라, 한국영화 중 어떤 작품이 다시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과 우려다. 자칫 봉 감독의 이 기록이 정점으로 각인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는 접어도 좋을 듯하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는 작은 영화이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기생충>과 함께 언급될 정도로 큰 존재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브래드피트의 영화사에서 제작했다는 이유로 초기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현지의 평가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인 외할머니 역할을 한 윤여정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며 탄탄하게 '오스카 레이스'를 하고 있는 <미나리>는 또 한 번 거대한 족적을 남길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소한 윤여정이 오스카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이 봉준호 감독과 다르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국으로 이민간 이들의 자녀들이 그곳에서 성장하며 얻은 수많은 고민들의 결과물들이라는 점이다. 정이삭 역시 자신과 가족의 경험을 영화 <미나리>에 모두 녹여냈다.
미국 이주를 한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미나리>가 이렇게 큰 관심을 받는 이유를 우리는 확인해 봐야만 한다. 단순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엄청난 성과를 얻었기 때문에 한국인 감독에 관심을 가진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2, 3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이 더욱 크게 화제를 모으고 평가를 받는 이유는 주인공이 동양인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인 라라 진이 한국인이 아닌 베트남계 미국인인 라나 콘도르가 연기했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하지만, 미국이라는 거대한 커뮤니티 속에서 아시안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등장했다는 사실과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 중요하다.
2018년 개봉되어 크게 화제를 모았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란 영화가 존재했다. 아시안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도 성공할 수 있음을 미국 현지에서 잘 보여준 영화였다. 한국 드라마의 전매특허를 그대로 답습한 영화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넷플릭스에서 최근 공개한 <블링블링 엠파이어> 역시 미국에서 사는 돈많은 아시안들의 일상을 한국인 입양아를 매개로 해서 담은 리얼리티 쇼다. 이렇게 미국에서 거주하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에 대한 관심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는 것도 흥미롭다. 단순히 <기생충>의 성공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다. 어찌 보면 <기생충> 역시 이런 흐름이 만든 결과물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에 걸맞은 완성도가 없다면 이 역시 불가능한 성취다.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집필한 작가 제니 한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자신의 경험을 녹아낸 작품이 세계인들을 환호하게 한다. 2018년 첫 제작이 된 이 작품은 3번째 시리즈까지 이어질 정도로 성공한 작품이다.
애플TV에서 제작 중인 <파친코>는 벌써부터 화재다. 이 작품 제목만 보고 모르는 이들은 "또 일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국인 이민진 작가의 역작을 바탕으로 드라마화되는 작품이다. 이민진 작가는 미국 한인 1.5세대로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다.
제2의 제인 오스틴이라 평가받고 있는 이민진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집중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존재다. 이북 출신의 아버지와 부산 출신 어머니를 둔 이 작가는 미국 이주한 부모로 인해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민을 떠났다. 다른 여러 한인들이 그렇게 힘겨운 역경 속에서도 이 작가는 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로 일하던 이 작가는 병으로 인해 작가로 전업했다. 그리고 몇 편의 단편과 함께 첫 장편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이 대성공을 거뒀다. 11개국에서 번역되었고, 전미 편집자들이 뽑은 올해의 책, 미국 픽션 부문 ‘비치상’, 신인작가를 위한 ‘내러티브상’ 등을 수상했다.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결혼한 후 남편의 일때문에 일본에서 거주한 4년이라는 시간은 이 작가에게 <파친코>를 쓰는 이유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재일교포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면서 역작은 완성되었다. 일본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한국인의 삶을 촘촘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4대에 걸쳐 80년간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삶에 왜 수많은 이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들은 그렇게 영화나 드라마로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안달이 났던 것일까? 이 작가가 애플TV와 계약을 한 이유를 밝힌 적이 있었다.
이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화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공을 백인으로 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백인으로 해야 소위 돈벌이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에서 애플TV 담당자는 달랐다고 한다.
20대였던 담당자는 이 작가의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작가는 무조건 주인공은 아시안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동안 미 주류사회는 의도적으로 아시안을 배척해왔다. 그런 강압적인 상황은 자연스럽게 아시안들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민자로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아시안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파괴하려는 이 작가의 노력은 결국 큰 성과를 거뒀다. 제니 한 작가도 강조했듯,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이 한인 작가들이 요구하는 것은 미 주류사회의 잘못된 인식과 폭력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애플TV에서 제작하는 글로벌 대작인 <파친코>의 주인공으로 이민호와 윤여정이 확정되었다. 그 외 한국과 일본 배우들, 그리고 재미교포 한인과 일본 감독들이 연출을 담당하는 등 흥미로운 작품으로 제작되는 이 작품은 미국 내 한인, 더 나아가 아시안에 대한 시각을 많이 바꿔줄 것이다.
일본 문화가 지배하던 미국은 변하기 시작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를 장악하며 미국 음악시장만이 아닌 전 세계 음악시장에 새로운 지표를 세우고 있다. 한국어 가사를 들으며 환호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젠 낯설지도 않다.
이민을 가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제니 한이나 이민진 작가만이 아니라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 역시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자신들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미국에서 한식 요리사로 최고의 명성을 쌓고 있는 주디 주 역시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하는 존재다. 콜럼비아 대학 출신으로 월가에서 큰돈을 벌던 주디 주는 어머니가 해주던 한식에 매료되어 요리사로 전업했다. 의사인 한국인 아버지와 화학전공자였던 한국인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른 한식 요리사가 되었다.
유명한 요리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주디 주는 한식을 베이스로 한 다양한 요리로 미국 사회에 한식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태어난 혹은 부모님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언급하는 이들로 인해 미국내 한국에 대한 관심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기생충>이 큰 사랑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천재성과 집요함이 만든 높은 성취도 한몫했지만, 미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 이들이 다진 이 성과가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담은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는 대변혁의 시작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화에 심취했던 미국인들이 이제는 한국 문화에 심취하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대중 문화가 큰 몫을 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더욱 코로나 팬데믹 시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다방면으로 높아진 상황에서 <미나리>가 몰고 온 성취가 과연 어떤 과정으로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글이 마음에 들면 공감과 구독하기를 눌러주세요]
'Cabinet 묵은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기맨숀-공포의 계절, 이상한 맨숀에 얽힌 이야기 하지만 공포가 없다 (0) | 2021.07.15 |
---|---|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복수에도 결이 다른 복수가 있다 (0) | 2021.06.07 |
내가 죽던 날-박지완 감독이 완성한 여성 영화의 가치가 반갑다 (0) | 2021.01.11 |
더 플랫폼-파격적 설정으로 만든 또 다른 설국열차 (1) | 2020.05.20 |
힘을 내요 미스터리-웃음 속에 묵직함 담았던 미스터 리의 삶 (0) | 2019.10.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