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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ma 드라마이야기/Korea Drama 한드

비밀의 문 의궤살인사건 세자 미치광이의 꿈은 여전히 뒤주에 갇혀있다

by 자이미 201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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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에 갇힌 채 죽어야만 했던 세자.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삶을 다룬 사극 <비밀의 문-의궤 살인사건>은 큰 반향을 불러 모으지 못하고 24회로 종영되었습니다. 왕과 신하 사이의 정치와 백성들의 분노 등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외면 받은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중성 잃은 대의의 한계;

사도세자가 마지막까지 꿈꾸었던 미치광이의 꿈은 여전히 뒤주 속에 있다

 

 

 

반상의 법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왕위를 이을 세자가 품은 꿈은 미치광이의 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은 당연하지만 양반과 상놈의 경계가 명확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틀마저 뒤틀어버리려던 세자에 대한 양반 사회의 분노는 결과적으로 그를 뒤주 속으로 이끌게 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사극을 통해 많이 다뤄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영조와 아들인 정조에 대한 이야기 역시 단골손님이라고 할 정도로 익숙한 소재이기도 합니다. 이런 익숙한 소재를 풀어 가는데 있어 문제는 다양하게 산재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역사에서 기술한 내용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더욱 잔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담는 이 사극은 시작부터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 되지는 작가의 상상력은 가미되어야 하는 힘든 경계 속에서 작가는 서지담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대신하려 했습니다.

 

서지담이라는 가공의 인물은 백성들과 궁궐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였습니다. 지담이라는 존재는 사도세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었고, 그녀를 통해 어떤 군주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기준들을 잡아가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서지담이라는 인물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했습니다. 지담의 역할에 따라 <비밀의 문-의궤살인사건>은 전혀 다른 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서지담은 실패한 캐릭터입니다. 초반 그녀의 활약이 큰 기대를 모았지만, 1회 이후 서지담의 역할은 점점 민폐 캐릭터로 구축이 되고 성인 연기자로 변한 이후에는 왜 그녀가 등장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서지담 캐릭터의 몰락은 곧 시청자들이 바라보는 이 드라마의 시각과 동일합니다. 작가의 분신이자 역사 속 상상력은 지담의 한계처럼 명확한 벽에 가로 막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동적인 존재로 반상의 법도가 명확한 조선 시대 격정적인 반등의 불씨가 되어야만 하는 서지감은 그렇게 화톳불도 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의 매개체인 서지담의 몰락은 결과적으로 드라마 전체의 균열을 불러왔고, 시청자들의 외면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명확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대중문화가 대중을 외면하는 방식이 된다면 이는 최악이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작품, 예술품으로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문화는 대중과 함께 해야만 그 가치와 의미가 부여됩니다. 대중들이 외면한 대중문화는 그만큼 그 존재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시청률 지상주의로 말도 안 되는 짜깁기가 성공한다고 그게 성공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대중문화를 하는 이들은 대중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피노키오>가 꿈꾸는 세상도 어쩌면 <비밀의 문-의궤살인사건>이 외치는 미치광이의 꿈과 유사합니다. 기레기가 된 기자를 통해 정의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은 반상의 법도가 명확한 세상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자와 세자의 입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두 작품이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대중성입니다. <피노키오>는 기자를 통해 바라본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는 균형감을 갖추고 있습니다. 복잡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단순한 구조로 끌어와 쉽게 풀어내며 주제의식을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방식은 결국 작가의 승리로 이야기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비밀의 문-의궤살인사건>은 정치의 핵심에서 벌어지는 정치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자들의 이야기보다는 기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 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형식이라는 틀에서 <피노키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상력이 거세당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야만 하는 한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대중들의 인지도가 높은 상황에서 이 사극은 실패했습니다.

 

균형감을 잃고 정치라는 무거운 주제에만 집중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영조와 대신들의 대립관계, 영조와 세자의 정치 대결, 영조와 백성, 세자와 백성 등 다양한 형태의 대립 구조 속에서 그들이 보이는 정치적인 행보들은 분명 흥미로웠습니다. 현실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는 그들의 정치는 분명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했습니다.

 

 

기존 사극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군신관계가 그려지기도 하고, 색다른 왕의 모습까지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고뇌하는 왕과 왕세자의 깊은 성찰을 담아주었다는 점에서 이 사극이 가지는 가치는 뛰어납니다. 절대자라는 존재는 쿠테타를 통해 얻어진 권력을 만끽하는 독재자와는 또 다른 의미였습니다. 왕권 시대 자연스러운 수순 속에서 정해진 왕의 자리. 그런 자리의 당연함보다는 그 자리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세자의 모습은 그래서 아름답고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왕세자인 아들을 죽인 잔인한 존재인 영조가 아니라, 그를 희생해서 세손을 구하고 정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해석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던 그가 왕이 되고 역대 왕들 중 가장 오래 살며 많은 치적을 쌓았던 영조. 항상 검소했고, 백성들을 위한 많은 고민을 했던 그가 자신의 아들을 직접 뒤주에 가둬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는 사실은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로 다가올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버지인 영조를 제거하기 위해 대전까지 치고 들어 온 나철주를 베고 아버지와 마주한 세자의 눈물은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자신을 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곧 정치라는 영조의 말에도 세자는 이를 행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세손을 지킬 수 있는 방책이 있느냐는 질문을 장인인 홍봉한에게 하며 스스로 뒤주 안으로 들어서는 세자의 모습은 장엄하기만 했습니다.

 

세자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는 가장 중요한 곳에 서재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에게 동등한 조건을 부여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재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비밀의 문-의궤살인사건>은 꾸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반상의 법칙을 깨트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힘은 결국 그들과 동등할 수밖에 없는 지식의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강자는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부를 이용해 자식들에게 최고 수준의 지식을 심어주는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권력이란 바로 그 지식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생의 절반 이상이 강남 부자들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은 곧 2014년 대한민국은 1700년대의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는 반상의 법도가 견고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극의 마지막은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정조의 얼굴이 사도세자와 같았다는 점에서 이를 무슨 공포영화로 이야기하는 이들도 존재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장치는 사도세자의 꿈을 정조가 펼쳐나갔다는 상징성을 부여한 장면이었습니다. 사도세자에 이어 정조로 이어진 미치광이의 꿈은 여전히 현재 시점에서도 미치광이의 꿈으로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치광이의 꿈은 사도세자가 꿈꾸었던 17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자신이 노력한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다고 그 반상의 법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돈과 권력은 현대사회의 반상의 법도를 만드는 기준이 되었고, 우리는 여전히 뒤주 속에 갇힌 채 미치광이의 꿈을 꾸는 처지 일 뿐입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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