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했던 피의 결말은 섬뜩하기도 했다. 권력투쟁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라 치부한다고 해도 그 죽음의 정치가 익숙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섯 죄인을 벌하려 했던 척사광. 어린 세종 이도가 정치란 나누는 것이라는 말과 정도전이 꿈꾸었던 모두가 소통하는 나라를 위해 한글이 등장하는 모습은 강렬했다.
정치란 나누는 것이고 소통하는 것이다;
잔인했던 권력 투쟁 이끈 이방원이 만들고자 했던 백성들이 웃는 세상, 우린 고려 말인가 조선 초인가?
이방원을 제거하기 위한 무명의 계획은 완벽하게 틀어지고 말았다. 이방원을 향해 날아든 이들로 인해 그는 보호되었고, 그렇게 새로운 세상은 완성되었다. 독이 든 술을 마시려던 이방원을 구한 분이. 뒤늦게 이방원을 구하기 위해 나선 무휼. 다섯 명의 죄인을 벌하기 위해 칼을 쥔 척사광. 정도전의 복수를 위해 나선 이방지. 그들은 그렇게 다른 목적으로 한 곳에서 만났다.
이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나선 길선미는 너무 강해져 돌아온 무휼과 상대해야 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보다 강렬해진 무휼은 그저 힘만 좋은 무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휼을 도와준 결정적인 또 하나는 바로 할머니가 전해준 목걸이였다. 목숨을 바꾸게 해준 할머니의 선물로 인해 길선미를 제압한 무휼은 척사광을 향해 달려갔다.
척사광은 조영규를 죽인 자이다. 자신이 동굴 앞에서 그를 죽였다면 친형과 같았던 조영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던 무휼은 그렇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이방지와의 대결에 합류한다. 무휼과 이방지가 함께 하지 않으면 결코 꺾을 수 없는 절대 무술의 소유자인 척사광. 그녀는 그렇게 두 무사의 검에 베인 채 목숨을 거둬야 했다.
다섯의 죄인 즉 무명,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그리고 절대 무술을 가지고도 죽음을 막지 못했던 자신까지 척사광은 그렇게 모든 것을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척사광은 무휼과 이방지라는 당대 최고의 무사들에 막힌 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죽여줘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척사광. 자신을 "살려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했던 척사광은 이제는 그렇게 자신의 죽음에 감사하며 떠났다. 이방지는 어머니와 함께 떠나고, 분이 역시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무행도로 향했다. 무사 무휼 역시 이방원이 내려줬던 검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방원의 책사였던 하륜도 알고 보니 무명의 조직원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적룡은 사무역도 금지하려는 이방원을 피해 보부상단을 운영하며 원 이름인 백달원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무명이라는 조직은 은밀하게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이방원이 권력을 잡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지만 탐욕스러웠던 하륜의 인생은 어쩌면 이런 배신이라는 틀 속에서 자란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땅과 백성들의 꿈을 잊지 말라"는 분이의 마지막 당부는 중요하게 다가왔다. 비록 계민수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과도하게 몇몇의 권력자에게 주어졌던 땅을 빼앗아 나누는 것은 곧 백성들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이의 꿈은 이방원을 통해 이어졌다.
2년이 지난 후 방과는 난을 일으켰고 즉시 제압당했다. 그렇게 정종은 동생 이방원에게 선위하게 된다. 즉위 3년 만에 왕의 자리에 내려온 정종. 그렇게 이방원은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왕의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다. 태종이 된 이방원은 측근들을 제거했다.
민씨 형제들을 죽이고 그들이 더는 정치에 끼어들지 못하게 한 태종은 그렇게 철저하게 측근 정치를 피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영특했던 셋째 아들 이도를 세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된 첫째 아들의 방탕함과 무모함은 스스로 왕이 될 그릇이 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이도는 정도전이 그렇게 만들고 싶은 왕이라는 인물에 부합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정치란 나눔이요 분배요. 누구에게 빼앗아 누구에게 나눠주느냐의 문제다"
"살아있으면 뭐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어린 이도가 정치란 무엇이냐는 태종의 질문에 정도전이 과거 했던 말을 한다. 정치란 나눔이라고 말이다. 어떻게 나누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그 말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용한 가치다. 나눔이 잘못되면 그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현실은 정치가 엉망이라는 당연한 논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진 자에게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하고, 가지지 못한 자들을 더욱 수탈하는 현재의 정치는 고려 말 부패의 온상이 되었던 정치와 정확하게 맞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는 곧 모두를 몰락하게 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렇게 우둔한 우리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잘 나누는 것이 정치라고 했지만, 정치를 하는 자들은 이런 나눔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자신들이 행복한 세상이다. 권력을 앞세워 호위호식하고 대대손손 자신들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정치꾼들의 야망은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
정치란 정치를 하는 자들의 것이 아닌 온 국민들의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들을 대표해 정치를 행하는 자들이 하나 같이 자신들의 욕심에만 집착하는 현실이 정상일 수는 없다. 국무총리라는 자가 플랫폼까지 차를 몰고 가는 권력만 내세우는 세상. 오직 자신들의 탐욕에만 눈이 어두워 국민들을 우롱하는 정치꾼들의 파벌싸움. 이 잔인한 현실 속에 가장 중요한 국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분이는 뭍으로 나섰다. 그런 그녀는 그곳에서 이방원의 아들 세종이 만들어낸 새로운 28자 한글과 만나게 된다. 영특하면 반나절 못나도 열흘이면 다 익힐 수 있는 글이 방원의 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도전이 그렇게 원했던 야망. 만백성들이 글을 깨우쳐 소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정도전의 이런 꿈은 방원의 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백성으로 평생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간 분이. 거대한 꿈을 꾸던 이방원이 아닌 학자인 이도를 모신 무휼. 그들은 그렇게 버텨내며 살았다. 하루하루 바쁘고 외롭게 살아낸 그들이 곧 희망이고 꿈이 되는 현실. 그렇게 <육룡이 나르샤>는 마무리되었다.
나눔은 경멸이 되었고 소통은 단절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눔과 소통이 무너진 곳이다. 과거에도 지키고 싶어 했던 그 가치는 그렇게 소멸되어버렸다. 나눔의 정치와 소통이 무너진 사회는 괴멸할 수밖에 없다.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육룡이 나르샤>가 보여준 마지막 회의 메시지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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