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드라마로서 가치와 기능을 해야 한다. 물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우리가 사는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묵직한 메시지 역시 드라마의 기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공작도시>는 가상이 아닌 현실에 보다 큰 방점을 찍고 이야기를 풀어왔고, 마무리 역시 건조할 정도로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했다.
이 드라마는 용산참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형산동이라 표현되는 그곳에서 벌어진 참사,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이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 사이, 제삼자처럼 존재하던 인물이 개입되며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재희는 그런 점에서 직접 당사자가 아닌 우리와 비슷한 관찰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성공이라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해자인 재벌과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 오히려 가혹하게 피해자를 공격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장면은 섬뜩했다.
증명해야 할 것들이 많은 중간자는 자신의 욕망의 끝에 있는 자들을 위해 보다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해야만 한다. 재희는 그렇게 성진가를 지배하는 한숙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다 잡았다 생각한 순간 추락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다시는 그들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재희는 자신을 희생해 한숙을 끌어내리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재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속영장 청구로 정호에 의해 수갑까지 채워진 재희는 이를 통해 성진가 사람들을 소환 조사하려 했다.
법과 정의라는 단어는 중요하게 다가오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들에게 이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가식적인 허울일 뿐이다. 그들에게 사용되는 것이 아닌 그들을 제외한 이들에게 유용한 것이 바로 법이고 정의이니 말이다.
재희는 준혁에게 마지막으로 올바른 선택을 요구했다. 남 짓밟고, 아픔 흉내 내며, 불행에 욕심내지 말고 살자는 재희의 말에 준혁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평생 욕망에 집착해 살아왔던 준혁에게 재희의 제안은 허튼소리나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준혁은 한숙의 손을 잡았고, 그렇게 형식적으로 참고인 조사로 수의를 입은 재희와 마주 앉았지만 돈의 힘은 법을 지배한다. 국가권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돈 권력은 그렇게 공권력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숙을 참고인으로 불러 흔들어보려 했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준혁은 자신의 친아들마저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친자식을 입양아라 발표하고 재희의 공격을 역공으로 치고 들어가는 성진가는 그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한 집단일 뿐이었다. "현우가 당신처럼 살아도 좋아"라는 재희의 읍소에도 자신의 삶은 비판하던 준혁은 자기 멋대로 사는 인생이 싫지는 않다.
한숙이라는 인물에 의해 길들여진 가축이지만 남들보다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나름의 권력도 누리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삶이라 생각하는 준혁에게 친아들을 입양아로 포장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현우가 성장해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면 망가질 수밖에 없지만, 준혁에게는 자신의 성공이 더 중요할 뿐이다.
한숙에 충성 맹세를 하고 앵커 자리에 오른 한동민은 성진가에서 던진 불법 입양 브로커 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하며 재희를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박용섭은 한순간에 김이설 살인자가 되어 체포되고, 현우와도 만나지 못하게 된 재희는 이혼에 합의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재희를 도왔던 검사 정호 역시 주연이 찍었던 사진을 이용해 위기를 맞게 되는 등 재희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한숙의 서고에 마주 선 재희는 이 거대한 벽 앞에서 마지막까지 대응해 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한숙은 이설을 만나고 그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재희에게 들려줬다. 마지막까지 재희를 위했던 이설은 역설적으로 욕망에 찌들었던 재희에 의해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지시로 이설이 사망했음에도 결국 모든 것은 재희 탓이라는 한숙의 행태는 준혁과 너무 닮았다.
자기변명에 능하고 그렇게 자신을 비호하는데 특화된 자들에게 자기반성이란 존재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기 합리화만 존재할 뿐이니 말이다. '공작도시' 연작 중 하나를 보며 이설과 한숙의 전혀 다른 시선과 그렇게 힘겨운 사람을 외면하는 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각도 바뀔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이 드라마가 가지는 가장 큰 희망이었다.
외면하는 인물은 재희로 특화된 대다수의 시민들이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바꾸려 노력하는 이는 소수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 불행을 보며 자신에게 전염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동경하지만, 그렇지 못한 정반대 사람들의 모습은 경멸하게 만드는 언론의 행태도 대다수 국민들의 부정적 시각을 가지도록 강요하고 있다.
가지지 못한 자들끼리 싸우도록 부추기는 시스템은 그렇게 철저하고 교묘하게 얽혀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체다. 한숙은 이설을 두려워했다. 그는 욕망의 시녀도 아니었고, 변화를 위해 직접 행동하는 존재였다. 비록 두려워 손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지만, 당당한 이설에 한숙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재희 역시 이설과 같았다면 한숙은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희는 그 순간 자신이 쌓은 그 허망한 모래성에 집착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착각한 권력을 이용해 이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숙은 희망을 봤다. 이설만 제거하면 불안요소는 사라진다는 확신 말이다.
이설이라는 두려움을 한숙이 이겨내게 한 것은 재희가 가진 허영심이었다. 어설픈 정의감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척하며 자위하는 자들의 참견을 언급하던 한숙은 사냥총을 재희에게 건네며 최소한의 명예는 지킬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조강현의 아내였던 권민선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를 요구하는 한숙에게 재희는 다른 선택을 했다. 자신을 조롱하는데 사용한 그림에 총을 쏘고 한숙이 짜 놓은 그물에 엮여 교도소로 간 그의 삶은 언뜻 보면 몰락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언론까지 장악한 성진가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은 진실이 되었고, 언론 보도라는 이유로 믿는 일반 대중은 그렇게 개돼지가 되어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집단 최면이나 다름없는 가스 라이팅을 당할 뿐이다. 재희가 그림 속 방관자를 쏜 것은 자신의 위선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다.
정준혁은 기자회견을 열어 재희와 현우를 재물 삼아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역할로 활용했다. 유력 정당에 입당하고 바로 대선 후보가 된 검찰 출신 앵커인 정준혁의 삶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망하며 어느 줄을 잡을지 고민하던 자들은 이제 정준혁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별장에서 그들만의 성상납에 취해 있을 뿐이다. 불법 입양을 숨기려다 시어머니인 한숙에게 총을 쐈다는 이유로 형을 살아야 했던 재희는 출소 후 이설이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살인 누명을 쓴 박용섭의 3차 공판이 있다며 정호는 재희가 증인으로 출석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실을 밝히려는 검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나마 작은 희망이기도 하다. 재희는 자신이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은 아닌가 두렵다. 그런 재희가 형산동 참사 추모 회장과 만나 그가 운영하는 작은 분식집을 찾았다.
그곳에 앉아 있던 재희는 이설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 도은영을 본다. 철거민인 은영은 제대로 된 이주비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날 신세다. 철거 날짜라도 미뤄 달라고 요청하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마치 7년 전 이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은영은 철거 사무실에서 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온 승합차에는 준혁과 무리들의 술자리에 합류할 여자들이 타고 있었다. 철거 날짜 미룰 수 있냐는 말에 운전하던 자는 차에 타라고 한다. 진짜 사장님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7년 전 이설은 그렇게 별장에 갔고, 준혁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은영도 그런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의 손을 잡아준 것은 재희였다. 한숙이 조롱하며 어설프게 간섭하고 개입한다며 조롱했다. 그리고 그런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를 것이라는 말처럼 재희는 오지랖을 부렸다.
정의롭지도 못하고, 그의 삶을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마치 대단히 정의로운 척하는 그 개입을 하지 말라는 한숙의 조롱은 그런 개입이 두려워서였다. 정의로운 척이라도 해가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부조리로 쌓아 올린 한숙의 성진가 같은 존재는 몰락하게 되니 말이다.
살기 위해 재희는 결혼 전 했던 화실 강사 자리를 얻었다. 친구 화실이라 겨우 얻을 수 있었던 일자리에 행복해하는 재희는 우연히 '기증 작품 전시회'를 찾았다. 그곳에는 조강현이 기증한 '난지도'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의 상징성은 이 모든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강제로 쫓겨난 이들의 모습을 그린 '난지도'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림을 보는 재희 옆에 선 이는 도은영이었다. 왜 자신을 붙잡았냐는 질문에 재희는 사과했다. 똑같은 잘못을 했다고 생각한 대응이었다. 그건 한숙의 말처럼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재희의 사과에 은영은 다른 말을 건넸다. 고맙다고 했다. 최소한 이 지독한 가난이 내 탓은 아니구나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회 시스템이 만든 부조리가 개인의 잘못으로 요구되는 현실은 그래서 분노하게 한다. 언론이 그런 부조리를 부추기고 미화하고 있다는 점은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준혁의 은밀한 파티에 모인 정치권 인사들과 법조인들, 그리고 준혁을 동경했던 어설픈 정의감을 앞세웠던 한 기자까지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자원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함축해 보여주었다. 우리 사회를 이끈다는 소위 엘리트 집단에 대한 분노는 그 한 장면으로도 충분했다.
이설을 닮은 은영은 재희에게 "달라지겠죠?"라고 질문했다. 그런 은영을 보며 재희는 "달라져야죠"라는 말로 희망을 봤다. 비록 여전히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는 한숙과 같은 위정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이지만 바꾸려 노력하는 수많은 이설들이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 그저 더디고 힘들 뿐이지만 말이다.
판도라 상자를 열었던 재희는 놀라서 중간에 닫으려 했다. 마지막에 남겨진 것이 희망이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7년 전 이설과 닮은 은영과 마주하며 마지막 남은 희망을 보게 되었다. 철저하게 현실을 비춘 이 드라마는 그렇게 희망을 언급했다.
용산참사를 이끈 자들은 수많은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드라마는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세상을 우린 목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론은 국민들에게 집단 가스 라이팅을 하고, 여론까지 호도하며 우리에게 개돼지가 돼라 강요하고 있다.
한숙이 재희에게 요구했던 상황은 현재도 우리에게 강요되는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희는 개돼지가 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설을 닮은 아이와 희망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힘이지만 그렇게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손을 맞잡으면 거대한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공작도시>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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