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최대 피해자는 시청자들이다
학벌지상주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도 있었음에도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주인공의 입에서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로 처리하는 모습은 씁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스 리플리>는 학벌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을 비판하기보다는 외모지상주의가 얼마나 위대한지만 알게 해준 드라마였습니다.
이번 주 시작과 함께 <미스 리플리>는 홍보를 통해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며 마지막 2회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반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청자들은 그들이 그토록 이야기하던 반전을 찾지 못한 채 허탈함을 달래야만 했습니다.
열대야로 인해 그래도 더운 여름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전개로 혈압까지 높인 이 드라마가 과연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하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작가나 연출자나 뭔가 잘못 생각한 듯합니다.
사회 병폐를 언급하면서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부패한 사회를 더욱 부패하게 만들 뿐이니 말입니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지 않은 채 그저 여러 이유들이 잘못할 수밖에 없도록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드라마는 독으로 작용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정시 뉴스? 신문, 정치인, 재벌, 언론인? 모두 아닙니다. 대한민국 대중들을 움직이는 힘은 드라마입니다.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다수의 대중들은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드라마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고 소통하고 이해하고는 합니다. 어제 봤던 드라마가 다음날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상황에서 드라마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막장이 지배하는 시대, 사회를 비판하는 드라마가 환영받는 시대, 서민들의 삶이 두드러진 시대 등 드라마는 시대를 반영하거나 역설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들여다보도록 해주고는 했습니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듯 드라마는 좀 더 세밀하고 긴밀한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맞닿아 숨쉬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방송 3사를 통해 쏟아지는 드라마의 수만 봐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드라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국민들이 드라마에 목을 매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국민들이 드라마를 일상의 삶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도 삭막해진 세상에서 드라마는 이런 현대인들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역할을 해주고는 합니다. 불륜이 지배하는 막장 드라마는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 사회의 어둡고 더러운 것들을 총집합시켜 놓은 '욕망의 전시장' 같은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라는 특성상 의도성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극적인 상황들로 흥미를 유발하는 것을 제외하면 사회면 어느 곳에선가 봤을 법한 이야기들이 모이면 막장 드라마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스 리플리>의 경우도 학력위조라는 중요한 테마를 다룬 만큼 사회적인 책임에 대한 고찰이 중요한 드라마였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벌만능주의에서 학력 위조는 어쩌면 필연적인 범죄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임금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학력 위조라는 범죄의 유혹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우선 입사 지원서 작성부터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여러 이유로 사회가 요구하는 학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로서는 꿈을 포기하느냐, 범죄를 통해 자신의 꿈을 성취할 것이냐의 선택을 요구받게 됩니다. 학력과 상관없이 실력으로 평가 받는 사회라면 굳이 심각한 범죄인 학력 위조를 하면서까지 직장에 취직할 이유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미리 리플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신정아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위조된 학력과 권력을 가진 남자를 통해 자신의 탐욕을 채운, 현대 사회가 만든 필연적인 인물이 드라마에서는 장미리에 투영되었습니다. 내용 역시 중요한 설정들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과정과 결과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력을 위조하고 일상이 된 거짓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진실을 던져버린 이 여인에게 주홍글씨라는 잔혹함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드라마는 당황스럽게도 모든 사랑을 장미리에 부여하며 '장미리 살리기'에 집중했습니다. 모든 거짓의 뿌리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있고 이렇게 자신이 망가지게 만든 것 역시 자신을 돌보고 책임지지 않은 부모 탓이라는 이야기는 모두를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모든 이들이 이런 범죄를 저질러도 용서가 되어야만 한다는 식의 전개는 지양되어야만 합니다. 특수한 상황과 설정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앞뒤도 맞지 않는 이야기들로 어떻게든 마무리 하는 게 중요하다는 식의 전개는 더욱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사회적 권력을 가진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행복해하며 삽니다. 의사였던 장명훈은 작은 시골마을에서 노인들을 진료하며 행복해 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진 몬도 그룹 부부는 사회봉사를 하며 즐거움을 찾습니다. 송유현 역시 어디에선가 살아있을 미리를 생각하며 좀 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1년이라는 수감 생활을 보내고 사회로 나온 장미리는 친구의 환대를 받으며 새로운 자신을 찾아 나서려 합니다. 드라마는 표면적으로 모두가 행복한 상황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설픈 엇갈림을 주면서 그것이 마지막 반전이라 주장한다면 반전이라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마저도 억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인과관계도 무너진 상황에서 설득력 없는 마무리는 그 누구도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굳이 작가와 연출자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자면 '신정아 사건'도 그렇듯이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 드라마 <미스 리플리>와 너무나 닮아 있지 않느냐는 정도입니다.
세상 부조리를 모두 제거해야 할 것처럼 논란이 거셌던 '신정아 사건'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극단적인 논란을 담은 책을 출간하면 그녀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드라마처럼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녀의 사건은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지만 이를 통해 우리 사회기 달라진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세상처럼 <미스 리플리> 역시 모두가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아야 할까요?
모든 것을 갖춘 사람들 틈 속에서 사회적 약자를 자청하며 권력의 꼭대기에 올라서려했던 한 여인. 실제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모든 것을 갖춘 천사 같은 재벌 후계자 송유현. 그로 인해 드라마와 현실의 이질감은 극단까지 치닫게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잔혹 동화를 쓴다고 해도 이렇듯 재벌을 미화하는 드라마는 씁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회가 떠안고 있는 숱한 부조리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며 시청자들을 대신하는 <시티헌터>까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학력지상주의 사회에 시청자들이 깊은 고민을 하고 학벌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담론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정도만 되어도 <미스 리플리>는 성공한 드라마였을 겁니다. 하지만 학벌을 능가하는 외모지상주의는 모든 것을 뒤덮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외모'라는 사실만 각인시킨 듯합니다.
외모만 뛰어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인식을 하게 해준 <미스 리플리>는 종방연이 주연 배우들이 모두 불참하며 마무리마저 씁쓸하게 만들었습니다. 숱한 문제들로 인해 방송 중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드라마. 담기에 버거웠던 이야기를 너무 욕심을 낸 제작진들의 착오가 시청자들에게 불쾌함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작가와 감독은 반드시 반성해야만 할 겁니다.
섬세한 연기와 촘촘하고 꽉 찬 이야기로 즐거움을 줄 것이라 기대했던 <미스 리플리>는 결국 출연 배우들에게 허탈함을 전해주고 시청자들에게는 끓어오르는 분노만 남긴 드라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는 이런 드라마와 조우하지 않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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