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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몬에 의한 독살 사건을 마주한 윤지훈이 자신의 스승을 돕기 위해 변심을 택하게 됩니다. 엄밀하게 타지자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과연 그의 변심은 정당한 것이었을까 란 의문이 들게 합니다. 이런 그의 변화는 의도된 결과로 다가오고 그 죽음의 의미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권력자들에 대한 잔혹동화?
윤지훈의 증언으로 독살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재벌인 정차영을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윤지훈은 안티몬이 독약인 것은 사실이지만 치사량이라 말할 수 없고 국내에서 증명된 사례도 없기에 검출된 양만으로 정차영이 타살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과를 내놓습니다.
20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속인 윤지훈의 스승에 대한 보답차원의 거짓이었습니다. 분명 정차영의 의도는 명확하지만 이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명확하지만 그의 범죄 사실을 자연스러운 자연사로 결정함으로서 그가 그토록 추구해왔던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돈을 가진 자가 권력까지 사들이며 우리 사회의 절대 권력이 된 상황에서 재벌의 살인이 정당화되는 상황은 당황함을 넘어 경악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분명한 살해의도가 있었고 실행에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 사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사회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죽음을 선택한 스승의 묘에서 스승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하고 말하는 윤지훈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존재해있었습니다. 이명한이 찾아와 자신도 현재의 윤지훈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며 권력을 잡는데 함께 하자 하지만 윤지훈은 마지막까지 진실을 찾는 방법을 택합니다.
국내에서 사례를 찾을 수 없어 확실할 수 없었던 안티몬 살인보다 명확한 사인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희생자가 바로 윤지훈이 내밀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습니다. 다른 안티몬 희생자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죽은 마지막 희생자는 안티몬이 아닌 다른 독으로 죽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윤지훈과 고다경은 정차영의 사업들을 통해 그가 사용하는 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복어 독이었습니다. 이미 살인에 대한 자신이 생기고 점점 살인에 중독되어 가던 정차영으로서는 신이라도 된 듯 타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살인놀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안티몬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복어 독은 마법의 지팡이 같았습니다.
살해 무기를 발견하고 마지막 사망자를 통해 증거까지 얻어낸 그들이지만 정작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정차영을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신한 부인을 죽인 정차영을 죽이기 위해 같은 독약으로 동반 자살을 선택한 이철원으로 인해 그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비리로 기업주가 된 정차영과 이를 알고서 돈으로 대신하려던 탐욕스러웠던 직원들의 대립은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극단적인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을까요? 드라마는 절대 처벌할 수 없는 권력자에게 감정적인 복수를 선택함으로서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 속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식 역시 드라마가 가지는 힘이자 재미이기도 하겠지요.
스승을 위해 선택했던 윤지훈의 변심(?)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희생을 불러왔고 그런 죽음 앞에선 그는 국과수에 사표를 던지게 됩니다. 자신이 왜 국과수에 있어야 하며 법의 관으로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반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마지막을 위해 시의 적절하게 다가옵니다.
여당 대통령 후보의 딸이 저지른 살인과 이를 감추려는 권력자들과 이에 맞서 정의를 실천하려는 이들과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숨고르기와 함께 윤지훈이 마지막까지 그들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런 혼란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싸인>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새로운 사건을 통해 윤지훈이 국과수에 복귀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가 스승과 자주 찾았던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서 벌어진 이상한 살인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며 다시 한 번 진실을 추구하는 법의 관 윤지훈으로서 우뚝 설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장르적인 재미를 추구하며 작은 마을을 휘감고 있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놓여 진 윤지훈과 고다경의 활약으로 이끄는 <싸인>은 흥미롭습니다. 시작부터 절대 권력자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소수의 대결 구도는 남은 7회 동안 어떤 식으로 정교해질지도 기대됩니다.
작가는 왜 권력자들을 살인범으로 설정했을까요? 절대 권력을 가지고 행하는 그들의 범죄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이라는 자대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돈이 권력을 사고 그렇게 사들인 권력은 다시 법마저 무용지물로 만들고 가진 자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며 사는 현실 속삶입니다.
그 부당한 거래가 정당화되는 사회 속에서 권력은 더욱 큰 권력을 탐하고 그렇게 얻어진 권력을 통해 다수를 지배하며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과정은 인간 사회가 만들어 온 탐욕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권력자들을 살인자로 설정한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정의라는 자대로 공정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권력을 가진 탐욕 자들에게 살인이라는 죄를 입히고 이를 응징하는 방식은 가장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더 이상 법앞에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 속의 서열은 더욱 종속을 강요하고 그렇게 굳건해진 세상이 한순간 변할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회에 순응하며 살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조금씩 변화를 꾀하고 그런 변화를 이끌어 가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몫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정의이기에 그들이 찾고자 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정의는 아름답고 슬프기만 합니다. 과연 마지막 회 그들이 시청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정의'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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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에 대한 잔혹동화?
윤지훈의 증언으로 독살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재벌인 정차영을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윤지훈은 안티몬이 독약인 것은 사실이지만 치사량이라 말할 수 없고 국내에서 증명된 사례도 없기에 검출된 양만으로 정차영이 타살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결과를 내놓습니다.
20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속인 윤지훈의 스승에 대한 보답차원의 거짓이었습니다. 분명 정차영의 의도는 명확하지만 이를 증명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명확하지만 그의 범죄 사실을 자연스러운 자연사로 결정함으로서 그가 그토록 추구해왔던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돈을 가진 자가 권력까지 사들이며 우리 사회의 절대 권력이 된 상황에서 재벌의 살인이 정당화되는 상황은 당황함을 넘어 경악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분명한 살해의도가 있었고 실행에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범죄 사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사회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죽음을 선택한 스승의 묘에서 스승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하고 말하는 윤지훈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존재해있었습니다. 이명한이 찾아와 자신도 현재의 윤지훈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며 권력을 잡는데 함께 하자 하지만 윤지훈은 마지막까지 진실을 찾는 방법을 택합니다.
국내에서 사례를 찾을 수 없어 확실할 수 없었던 안티몬 살인보다 명확한 사인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희생자가 바로 윤지훈이 내밀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습니다. 다른 안티몬 희생자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죽은 마지막 희생자는 안티몬이 아닌 다른 독으로 죽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윤지훈과 고다경은 정차영의 사업들을 통해 그가 사용하는 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복어 독이었습니다. 이미 살인에 대한 자신이 생기고 점점 살인에 중독되어 가던 정차영으로서는 신이라도 된 듯 타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살인놀이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안티몬과는 달리,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복어 독은 마법의 지팡이 같았습니다.
살해 무기를 발견하고 마지막 사망자를 통해 증거까지 얻어낸 그들이지만 정작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정차영을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임신한 부인을 죽인 정차영을 죽이기 위해 같은 독약으로 동반 자살을 선택한 이철원으로 인해 그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비리로 기업주가 된 정차영과 이를 알고서 돈으로 대신하려던 탐욕스러웠던 직원들의 대립은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절대 권력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극단적인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을까요? 드라마는 절대 처벌할 수 없는 권력자에게 감정적인 복수를 선택함으로서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 속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식 역시 드라마가 가지는 힘이자 재미이기도 하겠지요.
스승을 위해 선택했던 윤지훈의 변심(?)은 결과적으로 또 다른 희생을 불러왔고 그런 죽음 앞에선 그는 국과수에 사표를 던지게 됩니다. 자신이 왜 국과수에 있어야 하며 법의 관으로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반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마지막을 위해 시의 적절하게 다가옵니다.
여당 대통령 후보의 딸이 저지른 살인과 이를 감추려는 권력자들과 이에 맞서 정의를 실천하려는 이들과의 마지막 대결을 위해 숨고르기와 함께 윤지훈이 마지막까지 그들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런 혼란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싸인>이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새로운 사건을 통해 윤지훈이 국과수에 복귀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가 스승과 자주 찾았던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서 벌어진 이상한 살인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며 다시 한 번 진실을 추구하는 법의 관 윤지훈으로서 우뚝 설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장르적인 재미를 추구하며 작은 마을을 휘감고 있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놓여 진 윤지훈과 고다경의 활약으로 이끄는 <싸인>은 흥미롭습니다. 시작부터 절대 권력자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소수의 대결 구도는 남은 7회 동안 어떤 식으로 정교해질지도 기대됩니다.
작가는 왜 권력자들을 살인범으로 설정했을까요? 절대 권력을 가지고 행하는 그들의 범죄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이라는 자대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돈이 권력을 사고 그렇게 사들인 권력은 다시 법마저 무용지물로 만들고 가진 자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며 사는 현실 속삶입니다.
그 부당한 거래가 정당화되는 사회 속에서 권력은 더욱 큰 권력을 탐하고 그렇게 얻어진 권력을 통해 다수를 지배하며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과정은 인간 사회가 만들어 온 탐욕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권력자들을 살인자로 설정한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정의라는 자대로 공정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권력을 가진 탐욕 자들에게 살인이라는 죄를 입히고 이를 응징하는 방식은 가장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더 이상 법앞에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 속의 서열은 더욱 종속을 강요하고 그렇게 굳건해진 세상이 한순간 변할 가능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회에 순응하며 살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조금씩 변화를 꾀하고 그런 변화를 이끌어 가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몫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정의이기에 그들이 찾고자 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정의는 아름답고 슬프기만 합니다. 과연 마지막 회 그들이 시청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정의'는 어떤 모습일지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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