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오칙'을 우연하게 듣게 된 이방원은 당황했다. 모두 같은 가치를 향해 질주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말을 타려는 그들은 충돌할 수밖에는 없다. 세상이 바뀌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방원이 무명과 손을 잡게 되는 이유가 된다.
무명 속 분노가 밀본이 된다;
이방원 거대한 정치의 꿈, 정몽주와 정도전의 동상이몽 조선 건국의 시작
이방원은 무명을 추적하다 초영을 잡았다. 그녀가 바로 무명의 중요한 존재 중 하나인 지천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까지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지천태가 몰래 듣고 있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이야기를 이방원도 듣는 순간이었다. 정도전의 '오칙'을 듣는 순간 이방원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를 왕으로 삼은 조선을 건국한다고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왕이라는 견고한 성에 가둔 채 왕족과 종친들 모두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정도전의 꿈을 듣는 순간 이방원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조선을 건국하고 아버지가 왕이 된 후 그 자리를 물려받아 "백성들을 웃게 하고 기쁘게 해줄 정치"를 하겠다던 이방원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고 원했던 정도전이 오히려 자신의 꿈을 꺾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이방원이 왜 정몽주와 정도전을 모두 제거해야 했는지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은 흥미롭다. 그가 조선의 3대 왕이 되고 나서 외척들을 모두 제거하는 이유 역시 '무명'과 연결해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다. 역사적 사실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에서 상상력은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역사는 이미 정의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바탕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는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어떤 상상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지는 작가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이방원의 삶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작가는 '무명'을 개입시켜 색다르게 풀어내고 있다.
분이와 방지, 무휼 앞에서 이방원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분이가 원하는 세상을 자신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방원은 도전의 발언에 모든 것이 꺾이는 느낌이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정치를 일찍부터 배우고 깨우쳤던 방원으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나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이방원의 변화는 외형적인 모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생목'을 키웠던 방원은 다시 한 번 스스로의 마음속에 '살생목'을 품고 상투를 틀었다. 강한 의지는 곧 정도전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거짓으로 품어 내뱉었다. 자신을 회유하려는 초영을 통해 '무명' 조직의 핵심으로 다가서겠다는 방원. 그런 방원의 제안을 그대로 믿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정도전.
방원이 정도전에게 했던 제안은 계략이 아닌 그의 본심이었다. 다만 그 본심을 솔직하게 보일 수 없었던 방원은 '무명'을 이유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야심을 품었다. 자신의 사병을 키우고 독립하겠다는 방원은 이 모든 것을 '무명'을 잡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대처하기는 했지만 그건 야심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이성계 역시 정도전이 꿈꾸는 세상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야망이나 욕심보다는 대의를 보는 그가 정도전이 품고 있던 '재상총재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런 상황에서 날개를 꺾이고 싶지 않았던 방원은 스스로 마음속에 벌레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방원은 무휼 등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분가를 했다. 그리고 원대한 꿈을 꾸기 위해 그는 장인의 도움을 받아 사병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분이의 조직마저 흡수한 채 방원은 정도전의 '오칙'에 반기를 드는 꿈을 그렇게 꾸기 시작했다. 자신을 도와 왕위에 올려줄 책사로 방원은 하륜을 선택했다. 유배를 당하기 전 하륜을 찾은 방원에게 그는 몸을 사리라는 조언을 한다.
성급한 마음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욕망을 만나게 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며 철저하게 자신을 속이며 살라는 제안을 한다. 유배가 끝나고 돌아오는 날 자신이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하륜의 발언과 함께 이방원은 철저하게 모두를 속인 채 자신의 꿈을 키워간다.
홍인방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마음 속 벌레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방원은 그런 자신을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방원에게 정도전은 홍인방이나 크게 다를 것 없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새로운 칼로 이방원을 생각한 초영은 '사전 혁파'만 아니라면 뭐든지 협조하겠다고 제안한다.
땅을 빼앗길 수 없다는 '무명' 조직의 속내는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부를 놓을 수 없다는 의미와 같다. 권문세족보다 더 강대한 힘을 가진 '무명'은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온 '해동갑족'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그 '해동갑족'의 수장은 의외로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 일수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무명'과 손을 잡고 왕이 된 이방원. 역사에서 방원은 왕이 된 후 자신을 도운 외척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를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무명'과 연결시킨다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더욱 이방원이 하륜에게 둘을 제거하고 싶다며 가장 먼저 '무명'을 제거하겠다며 분개했다. 이는 거짓이 아닌 진심이라는 점에서 이방원의 외척 제거는 '무명'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밖에 없다.
하얗게 내린 눈밭에서 분이와 눈싸움을 하던 방원은 갑자기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는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방원은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날 준비를 마쳤다. 자신의 가장 순수한 열정을 품게 하고 간직하게 해주었던 분이와의 마지막 행복은 살풍경이 펼쳐지는 고려 말 정치에 뛰어든 이방원의 마지막 순수였다.
정도전의 거대한 꿈을 들은 정몽주는 탄식했다. 너무 완벽한 계획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왕을 거대한 제도 속에 가둬두고 유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들은 정몽주는 감탄했지만, 그것만 마음속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결코 자신이 정도전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공양왕을 찾아 '사전 혁파'에 나서 달라 간청하고 이색 등을 모두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간청한다.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을 제거해야 한다는 발언과 함께 정몽주는 그만의 꿈을 그렇게 실현시키기 시작했다.
공양왕의 여자가 된 척사광은 왕의 어명에 따라 정몽주의 호위 무사가 되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의 곁을 지키는 척사광은 주막에서 이방지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흐르는 기를 통해 상대를 알아보는 이방지와 척사광은 정도전과 정몽주의 엇갈린 모습처럼 필연적으로 마주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이방원의 상투와 눈물이 큰 의미를 가지면서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바로 '무명'이라는 조직이다. 그 조직 내에 길선미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가 과연 권력만 추종하는 '무명'과 영원히 함께 할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방원을 통해 연향의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초영에게 입단속을 시키는 길선미는 분명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길선미는 땅새와 분이가 어린 시절 연향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땅새가 현재의 이방지가 될 수 있도록 도왔던 인물이다.
길선미가 초영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무명' 조직 내에서 무오년 내분이 일었다는 이야기는 복선으로 다가온다. 현재의 '무명'은 자신들의 권력에만 집착하는 거대 조직일 뿐이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밀본'은 이들과는 다른 뜻을 품고 있다.
'무명'은 왕권을 통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대를 옹호한다. 그리고 그런 왕권을 비호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굳건하게 고착하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이와 달리 '밀본'은 '재상총재제'를 외치는 비밀조직이었다. 전혀 다른 둘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내분을 통해 갈라서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재상총재제'는 말 그대로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이끄는 행위다. 일당 독재가 아닌 수많은 견제를 통해 궁극적으로 백성들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현대적 민주주의와 가장 유사한 형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런 꿈을 꾼 정도전이 '왕권 강화'에 뜻을 둔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는 것은 안타깝기만 하다.
'왕권 강화'의 꿈을 품은 이방원과 '칼'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무명'은 손을 잡는다. 그리고 토사구팽을 당할 수밖에 없는 '무명'과 달리 백성이 주인이 되는 '재상총재제'를 꿈꾸는 '밀본'은 연향의 아이들인 분이와 이방지 등에 의해 새롭게 꾸려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역사에는 '무명'도 '밀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비밀조직으로 끌어냄으로서 이방원이 왜 그렇게 잔인한 방식을 통해 왕위에 올라서려 했는지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역사서에 기록된 이방원의 모든 기록들만으로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풀어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들이 내세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과 존재들은 중요하다.
상투를 튼 이방원은 이제 자신의 스승과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인 민다경과 장인인 민제의 힘을 빌려 그는 원대한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진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이방원의 행보는 흥미롭다.
여기에 '무명'은 내분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밀본'이 탄생하게 된다는 설정은 <뿌리깊은 나무>와의 연결고리로서도 이후 이야기 흐름을 위해서도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 풀어갈지 기대된다. <육룡이 나르샤>는 이제 막 각자 서로 다른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해당 사진들은 모두 본문 이해를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모든 권리는 각 방송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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