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공기가 질척하게 내 몸을 감싸는 느낌, 혹은 질척거리듯 겹겹이 묻어나, 벗겨내고 싶은 감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그런 느낌을 초반에 가득 담고 있는 느낌입니다. 배경이 여름이라 그런지 더욱 질척거리는 그 감정은 염씨 삼남내의 삶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죠. 그런 그들에게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방이 하고 싶다는 미정은 그렇게 사내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이들과 ‘해방클럽’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무엇에서 해방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방’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도 미정은 행복했습니다. 구씨에게 뜬금없이 추앙해서 자신을 채워 달라는 미정의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 민망함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짜고짜 술 마시던 자신에게 와서 화풀이하듯 나를 채워주라는 미정의 행동에 구씨도 황당했습니다.
남자에게 돈 빌려주고 못 받아서 그런 거냐며, 남에게 떠넘기지 말고 알아서 처리하라 합니다. 남자들도 여우라 돈 빌려가고 갚지 않아도 항의도 못하는 상대는 잘 안다며, 미정의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미정에게는 돈만의 문제는 아니었죠. 다들 잘난 척 쏟아내는 말들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수없이 말들을 쏟아내고, 그런 말들이 미정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죠. 그 충돌은 미세하지만 이들에게 모두 파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구씨에게 한 말 때문에, 집순이인 미정은 동료에게 집에 가기 싫다는 말까지 합니다. 처음 듣는 미정의 발언에 오히려 행복한 그들은, 낯선 남자가 집에서 밥 먹는단 말에 호기심만 가득합니다. 그들에게 미정의 이야기는, 그저 그렇게 소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모두 그렇게 소비될 뿐이죠.
늦게 집으로 돌아가던 미정은 어두운 길 끝에 차를 세워두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두 명의 남자에 긴장했습니다. 도시도 아닌, 시골길에서 이런 자들을 만나면 두려운 것은 당연하죠. 구씨 생각에 화나서 들었던 돌멩이는 용도 변경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긴장하고 걷는 미정을 안심시킨 것은 구씨였습니다. 그날도 술을 사가지고 집으로 향하던 구씨가 이 상황을 보고 행한 행동은 이 드라마가 얼마나 하이퍼리얼리즘을 표방하는지 잘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낯선 남자들이 미정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구씨는 의도적으로 술병들이 부딪치게 하며 걸었습니다. 긴장하고 두려워할 미정에게 뒤에 내가 있음을 알려, 안도하게 만드는 이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그 미세함으로 상황과 관계를 설명해주었으니 말이죠. 그들이 돌아간 후 아무런 인사도 없이 각자 갈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미정의 감정선들은 구씨를 만난 후 큰 흐름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내 동아리로 울었다는 말에 후배는 걱정되어, 알맞아 보이는 동아리를 추천하지만, 미정은 배우는 거 그만두고 싶다고 합니다. 획일적으로 짜인 순서가 존재하고, 다수를 위해 소수는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그 속도가 미정에게는 맞지 않았죠. 처음과 달리, 시간이 흐르며 뒤쳐져 그저 구경꾼이 되어버리는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돈을 빌려가고도 오히려 자신에게 큰소리치는 선배 문자에 미정은 욕까지 내뱉었습니다. 그동안 속으로 삭히기만 했던 미정의 소리가 사무실에 퍼지며, 모두가 조용할 수밖에 없었죠. 제 발 저린 팀장은 자신에게 했냐고 묻는 상황은 미정의 변화가 작지만 시작되고 있음을 잘 보여줬습니다.
소개팅에 나선 기정은 행복했습니다. 비록 경기도 북쪽과 남쪽에 살고 있지만,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이 즐거운 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소개팅 주선자가 기정을 ‘받는 여자’라고 지정한 이유를 설명하다, 처음이 끝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정이 친구들과 ‘남녀 사이 최고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린 시절 봤던 참수당한 남편 머리를 받은, 아내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여기에 예수의 마지막을 함께 한, 마리아 이야기까지 하며, 죽음보다 그 뒤에 한 여성들의 행동에 경도되어, 멋있다는 기정의 사랑은, 박 이사가 분류한 것을 보면, 스릴러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우연히 편의점에서 복권을 사는 박 이사를 만난 기정이 함께 나눈 연애학 개론은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를 듣고 싶었던 기정에게, 박 이사는 남자들의 취향은 바뀌지 않는단 말로 피해갑니다.
연애 경험이 적으면 자신의 취향도 모른다는 박 이사는 자신도 멜로라는 기정에게 다양한 장르를 언급하다, 스릴러가 맞다는 말은 소개팅 결과를 보면 족집게처럼 잘 맞았습니다. 개그맨과 배우 부부가 많은 것은 자주 만나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인간상이 다르다는 박 이사 조언이, 과연 기정을 깨울 수 있을까요? 막무가내 연애가 아니라, 맘에 드는 남자에게 고백하라는 조언이, 태훈과 관계를 만드는 이유가 될지도 궁금합니다.
쨍하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기정을 기다린 것은 창희의 공격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여자와 사귀려하냐고 질타하자, 그런 ‘상황이 오면’이라고 극단적 상황에 자신이 취할 태도를 이야기하는 기정은 여전히 꿈꾸는 소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인 창희는 그런 상황을 왜 생각하냐고 지적하지만, 끝까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만 고민하는 기정은 창희와는 전혀 다른 부류였습니다. 누나와 오빠의 다툼에 자신도 그런 상황이라면 받겠다는 미정도 그 감정 선에서 갇힌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왜 ‘받는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요? 창희 말처럼 동지를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녀의 사랑이 아닌, 인간으로서 사랑을 가지고 싶은 기정과 미정의 바람이 그 ‘받는 여자’에 담겨 있어 보이니 말이죠.
누나의 답답한 연애를 지적한 창희의 사랑도 자랑할 거리는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다 지하철에서 기정이 만난 창희 옛 연인인 예린으로 인해 그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났죠.
혼자 영화보고 밥 먹게 만들어서 헤어졌다는 예린의 말에 창희는 반박하죠. “아! 이놈 별거 없구나”라는 특유의 눈빛이 있다며, 그걸 보는 순간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에 들 수 있게 노력하지만, 더는 개선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부터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서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창희는 별 볼일 없어 헤어지는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렇게 그게 이유가 되어 헤어지게 만드는 것은, 초라한 현실에서 창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미정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욕했던 자들이 보인 그 눈빛은 부족함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 역시 부족하지만 만나는 존재였을 뿐이었음으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넌 부족하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은 미정을 별 볼일 없는 인간 혹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에 염증이 나는 미정입니다.
어디서 답을 찾아야 할지 모르는 미정에게 구씨는 이미 답을 줬습니다. “너는 누구 채워준 적 있어?”라는 말이 답이었습니다. 자기도 누구에게 해주지 않은 추앙을 자신에게 해달라는 요구는 그가 그동안 살아오며 맺은 인간관계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사내 동아리에 들지 않고 버티는 삼인방은 재소환되었고, 이런 상황이 불편한 박 부장에게 태훈은 우리가 동아리 만들면 어떠냐고 묻습니다. 그냥 만들고 안 만나면 그만이라며, 사내 동아리 목록을 찾는 그들에게 미정은 ‘해방클럽’을 만들자고 합니다.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뭔지 알 수 없지만 답답함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미정의 말에 박 부장도 반색하며 “좋다. 해방”이라며 호응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해방클럽’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지부터 고민하는 과제를 안았습니다.
미정은 이 해방이라는 단어를 공유하며 달라졌습니다. 그저 투명인간처럼 살던 미정이, 활기차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새참을 먹은 후 부모님은 바로 일을 하러 가지만, 넋 놓고 있는 구씨를 보고 미정은"혹시, 내가 추앙해 줄까요? 그쪽도 채워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출근하다 스쳐가는 구씨에게 인사라도 하자는 미정의 행동은, 스스로 ‘해방’을 언급하며 생긴 변화였습니다. 그런 미정의 행동에 당황한 구씨는, 마을버스가 오니 뛰라는 말만 합니다.그건 구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였습니다. 마을버스를 보며 뛰는 미정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차에 올라탄 미정의 표정은 옅은 미소와 함께 뛰어서 그런지, 아니면 구씨의 태도 때문인지 모르지만, 발그레해진 볼과 가쁜 숨이 존재했습니다. 그 작은 변화로 인해 미정은 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미정에 의해 흔들리는 구씨 역시, 쉽지는 않지만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해방일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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